∇한국 교회 130년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들. 왼쪽위부터 시계방향으로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시발점이 된 평양 장대현 교회/ 1984년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대회/ 2007년 한국교회대부흥백주년기념대회/ 2010년 한국교회815대성회
<절정 – 성령충만 평양대부흥, 윤리적 바탕까지>
1907년 1월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운동은 이후 전국적으로 파급된 신앙운동으로 한국교회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같은해 1월 6일부터 10여 일간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있었던 사경회 기간 중 절정에 이르렀던 이 운동은 1903년 선교사들의 기도회 모임이 도화선이 됐다.
1904년 1월 원산에서 다시 개최된 교파별 연합기도회에서는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 럽(A.F.Robb)이 성령을 체험하는 역사가 일어났고, 전계은, 정춘수 등의 한국인들이 큰 은혜를 입어 원산지역 부흥운동을 주도했다. 선교사 중심의 기도회로 원산에서 시작된 성령의 역사는 1905년 8월 평양에서 다시 일기 시작했다.
1907년 장대현교회의 부흥사경회를 통한 대부흥운동은 처음부터 계획된 것은 아니었으나, 당시 이러한 부흥회의 열기는 삼남지방 목포까지 전해져 회개와 부흥의 운동이 확산됐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일어났다.
특히 길선주 장로의 집회 인도 때는 회개와 부흥의 성령역사가 강하게 나타났다.
첫날부터 성령의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한 평양사경회는 집회가 계속되면서 더욱 부흥운동의 열기는 학생들과 여성들에게 전파되면서 더욱 가속화 됐다. 당시 기독교계통 학생 2,500명이 부흥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이들에 의한 집단적인 전도운동이 전개됐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회개와 기도 운동의 초석’ ‘한국교회 최초의 성령운동’ ‘외국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성도들의 연합’ ‘성경 중심의 부흥운동’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회개운동과 기도운동 그리고 성령운동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대부흥 기간에 이 세가지 운동은 당시의 모든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 일어났다. 이것은 교회연합 활동에도 매우 깊은 의미를 시사한다. 원산에서 시작돼 서울을 거쳐 평양에 이른 부흥운동을 통해 한국교회는 ‘하나되는 성령역사’를 체험하게 된다.
평양 대부흥운동
1903년 8월 원산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성령의 불길은 한반도 전체로 번져갔으며, 공개적으로 자복하는 선례를 보여줌으로 대중적 회개운동을 이끌어 냈던 하디 선교사는 자신이 담당했던 원산과 강원도 북부 지역은 물론이고 다른 지역에서도 ‘부흥강사’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1904년 1월에 열린 원산 장로교 감리교 연합사경회에서 원산 교인들 사이에 대대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났고, 전계은 정춘수 같은 교회 지도자들이 길을 가다가 갑자기 꼬꾸라져 뒹굴며 엉엉 울면서 기도한 것이 이 때의 일이다.
2월에는 개성 남부교회에서 10일 동안 집회를 인도했는데, 개성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3월에는 서울 종교교회 9월 말에는 서울 정동교회에서 집회가 있었고, 교인들과 이화 배재 학생들이 성령을 체험한다.
인천 집회를 끝으로 하디가 안식년 휴가를 얻어 본국으로 들어간 1905년 11월 이후에도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부흥운동의 불길은 모닥불 같이 이어졌다.
1906년 서울에서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들이 연합으로 인도한 부흥회가 두 주간 동안 열렸고, 개성에서도 연합 부흥회가 열렸다.
그러다가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실질적인 도화선이 되는 평양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의 연합 사경회가 8월에 1주일 동안 열렸으며,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하디가 인도했다.
1906년 늦여름 시작된 기도회는 가을까지 계속 이어졌고 11월에 시작되는 연합사경회로 연결됐다.
예정된 2개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모인 이들은 흩어지지 않았고 계속 사경회를 이어갔다. 이어지는 사경회의 목적은 ‘성령의 임재하심’이었다. 1,500여 명이 모여 1907년 1월 6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된 연장 사경회의 처음 한 주일은 그렇게 지나갔다.
기다렸던 사건은 두 번째 주간 월요일 저녁인 1월 14일 일어난다. 당시 부흥회를 인도했던 장로교 리(G.Lee) 선교사는 이렇게 증언한다.
“월요일 저녁 우리는 무슨 일이 벌어질는지 모르는 상태로 예배에 참석했다.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시기를 하나님께 비는 마음뿐이었다.
예배당에 도착해서 우리 모두는 무언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짧은 설교가 있었고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 통성기도로 들어갔다. 통성기도는 이 때 집회의 특징이었다.
기도가 끝나고 몇 사람이 나와 간증한 후 인도자가 찬송을 인도한 후, 집으로 돌아갈 사람은 가고 새벽까지 남아 기도하며 자기 죄를 회개할 사람은 남아 있으라고 광고했다. 대부분이 돌아갔으나 5, 6백 명 정도가 남았다.
우리는 그들을 ㄱ 자로 꺾어진 교회 중앙으로 모았다. 그리곤 기도회를 시작했는데 기도회는 지금까지 우리가 보지 못했던 그런 형태로 진행됐다.
기도를 마친 후 회개할 사람이 있느냐고 하자 그 순간 하나님의 성령이 모인 사람들 위에 임하였다. 한 사람씩 일어나더니 자기 죄를 자백하고는 쓰러져 울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루에 몸을 뒹굴며 주먹으로 마루 바닥을 때리면서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다. 우리집 요리사도 자복하면서 뒹굴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목사님 말씀해 주세요. 내게 소망이 있습니까? 과연 제가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하면서 내게 달려와 몸부림치며 울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집회는 이튿날 아침 10시가 되서야 끝이 난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사에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는 ‘평양대부흥운동’의 시작이다.
집회 때마다 통성기도에 이은 공개적 자복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1월 20일에는 고등성경학원에서 모이던 여성들에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2월 10일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열린 감리교 연합사경회에서도 역시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봄이 되면서 평양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의 열기가 전국으로 확산된다. 북으로는 신천과 의주, 남으로는 재령과 서울, 그리고 광주 대구까지 그 열기가 확산됐다.
이 불길은 선교사와 한국인들을 변화시켰다. 평양에서 있으면서 부흥운동 현장을 지켜본 감리교 무어(J.Z.Moore)가 제출한 1907년 선교보고에서 변화의 실상을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은 이번 부흥운동으로 한국인들이 다른 식으로는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 체험을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보혈, 그리고 부활에 대한 옛 복음이 이제 값없이 주시는 은총, 충만하고 완전한 구원으로 생생하게 체험되고 있으며, 말 그대로 게으르고 무능하고 무익했던 무리가 변해 엄청난 능력을 지닌 복음전도자들이 됐습니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야 말로 한국 백성들의 영적 기갈을 해소시켜줄 수 있음이 증명됐습니다”
한국교회와 사회 윤리 근간의 밑거름이 된 회개와 부흥운동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어른들의 부흥운동은 평양 숭실학교, 광성학교, 숭의여학교 등 학생들에게 확산됐다.
장로교와 감리교 합동으로 운영되던 숭실대학교에서는 봄 학기가 시작되자 마자 2주간 사경회가 열렸다. 학생들은 매일 수업이 끝나고 오후 4시부터 집회에 참석했는데, 어른 집회와 마찬가지로 학생 집회에서도 통성기도와 회개 자복이 일어났다.
숭실대학 학장으로 있던 베어드(W.M.Baird)의 부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학생들은 자기 이마 혹은 손으로 마루바닥을 쳤으며, 말 그대로 고뇌에 사로잡혀 마치 악마가 그들을 찢어 놓는 듯 울부짖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버티고 앉아 있기가 어려웠는지 벌떡 일어나더니 울면서 자기 죄들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쏟아놓은 자백들은 충격적이었다. 마치 지옥이 발칵 뒤집힌 것 같았다. 살인, 간음 등 온갖 더럽고 추한 행위들에서 시작해 방화, 술주정, 도둑질, 강탈, 거짓말은 물론이고 시기와 질투, 멸시와 미움 등 별의별 죄들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듣고 있던 사람들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끄집어낼 수 없는 고백들이었다”
이 부흥운동 기간 중 집회 때마다 죄의 자복이 터져나왔으며, 1907년 4월 1일부터 시작된 평양 연합사경회도 마찬가지였다.
40년 전 제네럴셔먼호 사건 때(1866) 토마스 선교사의 목을 쳤던 박춘권이 그 사실을 자복한 것도 이 무렵이다. 덕분에 미궁에 빠졌던 사건들도 많이 해결됐다.
경찰들은 사경회 장소에 몰래 들어와 자복하는 교인들의 신상을 파악해 두었다가 집회 후 범인 검거에 열을 올렸다. 또 그런 목적으로 예배당 안에 들어왔다가 회개하고 교인이 되는 경찰들도 있었다.
이렇게 죄를 자복한 교인들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한다. 깊이 있는 ‘죄의식’(罪意識)은 회개를 불러 일으켰고, 진실한 회개는 변화된 행동으로 입증됐다.
교인들은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기준과 원리를 세우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평양에 있던 무어 선교사는 부흥운동의 중요한 열매의 하나로 새로운 윤리의식 형성을 꼽고 있다.
“(부흥사경회의) 하루 일정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전에는 한 시간 기도회를 하고 두 시간 동안 성경을 공부한다.
오후에는 한 시간 공부를 하고 나서 교인 생활에 활력소를 줄 수 있는 주제를 갖고 한 시간 동안 토론회를 갖은 후 다시 한 시간 동안 거리로 나가 축호전도를 한다.
저녁에는 전도 집회를 연다. 오후 토론회는 조혼(早婚) 교육 순결 흡연 등의 주제를 놓고 공개토론으로 진행된다.
토론에 참가하는 토착 교인들의 열정과 예리함은 놀랄 만하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한국교인들이 토론을 통해 문제된 것에 대해 도덕적 입장(moral stand)를 정립한다는 점이다”
부흥운동을 겪은 한국 교인들은 회개와 자복을 한 후,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새로운 ‘윤리의식’(倫理意識)을 갖게 됐다.
부흥운동 기간 중 고백된 죄목을 보면 살인과 간음, 절도, 거짓말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죄로 분류되는 보편적인 것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는 흡연, 축첩(蓄妾), 노비(奴婢), 제사(祭祀), 주술(呪術) 같이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죄목’에 들지 않았던 행위들도 포함돼 있다.
주로 유교나 불교, 민간신앙에 근거를 두고 이어져 내려온 생활 습관들이 이제 기독교 신앙 원리에 비춰 ‘비도덕적인 것’으로 규정되기 시작한다.
이런 행위들이 ‘죄목’으로 나열됐다는 것은 지금까지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유교 및 전통 종교 윤리를 대체할 새로운 윤리가 형성되고 있으며, 그 새로운 윤리의 종교적 근거로 기독교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기독교적 윤리’가 일반 사회에서도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졌다.
초기 부흥운동은 한국 교인들의 회개운동으로 그치지 않고 한국의 근대 사회 윤리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글쓴 이: 이천수 목사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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