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2기 첫 주한미국대사 후보로 13일(현지시간) 지명된 미셸 박 스틸(70·오른쪽) 전 연방 하원의원이 2023년 4월 26일 열린 한·미 정상 국빈 만찬장에 딸 시오반 스틸과 함께 입장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난 2004년 대선을 앞둔 여름, 나는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를 취재하고 있었다. 당시 전당대회 대의원 중 아시아계는 2% 남짓. 그 척박한 곳에서 한 한국계 여성을 만났다. 미셸 박 스틸. 전국적으로 알려진 정치인은 아니었고, 캘리포니아 지방 정치에서 막 이름을 넓혀가던 참이었다.
그는 재선을 노리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1기 내각에 아시아계 인사 두 명, 노먼 미네타 교통장관과 일레인 차오 노동장관을 등용한 사실을 언급하며 한인 정치력의 약진을 확신했다.
대화가 부시 2기의 대북정책 전망으로 넘어가자 목소리 톤은 확연히 달라졌다. 정확한 표현까진 기억나지 않지만, 정치적 수사라기보단 개인사에서 나온 말처럼 감정이 실려 있었다.
옆에 있던 남편 숀 스틸은 더 인상적이었다.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 입은 이 백인 변호사는 내게 친근하게 악수를 건넸지만, 곧 진한 승부사 기질을 드러냈다. 매우 직설적이었고, 묻지 않은 것까지 디테일하게 설명했다. 조용한 배후 인물이라기보다 정치의 판을 읽고 밀어붙이는 사람에 가까웠다.
넷플릭스 드라마 “디플로매트(The Diplomat)”를 본 독자라면 주인공 케이트 대사 곁의 적극적인 남편 ‘할’, 한국식으로 말하면 김종인 씨 같은 정치 책사형 인물을 떠올리면 좋을 것 같다. 무대 뒤에만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하면 직접 판에 뛰어드는 사람.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그가 훗날 미셸 스틸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줄은 몰랐다.
22년이 흘렀고 그때의 미셸 스틸이 하원의원을 거쳐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주한 미국대사로 지명됐다. 한국 언론은 자연스럽게 미셸을 본다. 한국계 여성. 이북 실향민 가정의 딸. 한국어에 능통한 대사 지명자. 모두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 만으로는 절반만 본 것이다. 미셸 스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남편 숀 스틸을 먼저 봐야 한다.
(미셀 스틸과 남편 숀 스틸)
숀은 단순한 배우자가 아니라 미국 공화당 보수정치의 오래된 거물 내부자이기 때문이다.
1946년생인 그는 18살 때 샌퍼난도 밸리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600km 거리를 히치하이킹을 해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배리 골드워터 추대를 위한 전당대회를 보러 갔다. 그 뒤 60년 동안 공화당 전당대회에 모두 참석했다. 골드워터에서 레이건으로, 부시에서 트럼프로 이어지는 미국 보수정치의 변화를 현장에서 지켜본 인물이다. 공화당 지도부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다.
그의 정치 이력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중 하나는 2003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리콜 운동이다. 민주당 소속 그레이 데이비스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끌어내리고 아널드 슈워제네거를 주지사로 만든 사건인데, 그 리콜 청원서를 설계하고 주도한 두 주인공 중 한 명이 숀 스틸이었다. 당시 부시 진영 주변에서조차 무리한 시도라며 꺼렸지만, 그는 밀어붙였고 슈워제네거를 주지사로 만들었다.
이후 그는 캘리포니아 공화당의 핵심 리더가 됐다. 2008년부터 공화당 전국위원회, 2018년부턴 RNC 집행위원회에도 들어갔다. 또한 미국 보수 진영의 대표적 반(反)증세 단체인 ‘클럽 포 그로스(Club for Growth)’ 캘리포니아 지부의 창립 이사이기도 하다.
캘리포니아는 민주당 초강세 지역이지만, 미국에서 정치 자금이 가장 많이 흐르는 주이기도 하다. 2024년 6월, 트럼프가 뉴포트비치와 비벌리힐스에서 수천만 달러를 모금한 캘리포니아 기금 모금 행사에서, LA타임스가 그 현장의 목소리로 인용한 주인공이 숀 스틸이었다.
RNC 전국위원 직함은 단순한 명예직이 아니다. 기부자 명단에 접근하고, 기금 모금 행사를 조직하고, 후보에게 당의 자금을 연결하는 실질적 통로다. 숀은 그 물길을 알고 만드는 사람이다. 어디서 돈이 흐르고, 어느 문을 두드려야 하는지.
그래서 미셸 지명자의 정치 경력은 숀 없이 설명하기 어렵다. 미셸이 2006년 캘리포니아 조세평형위원회에 처음 당선된 건 숀이 주 공화당 의장직을 마친 뒤 몇 년이 지나서였다. 남편이 쌓아온 기부자 네트워크, 당내 인맥, 선거 전략이 미셸의 정치 진입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보긴 어렵다.
그렇다고 미셸에게 자기 서사가 없는 건 아니다. 그의 부모는 북한을 탈출한 실향민이다. 미셸은 자신의 부모가 공산주의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 허허벌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고 말해왔다. 가치와 서사를 중시하는 미국에서 선거용 구호처럼 들릴 수 있지만, 실향민 가정에서 자란 사람에게 북한은 외교 현안이기 전에 가족사의 일부다.
나는 하원의원 시절의 미셸을 여러 차례 행사장에서 만나고 북한 관련 코멘트도 종종 받았었다. 마음은 북한의 변화와 한반도에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앞세워 자신을 포장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정치 기술적으로 매우 노련했고,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했다. 영 김 하원의원과는 언니와 동생처럼 서로 챙기는 모습도 보였다.
그래서 미셸의 북한 인권 발언은 일반적인 의원실 성명과는 결이 달랐다. 워싱턴을 찾은 탈북민들의 의회 방문을 지원했고, 블링컨 국무장관에게 북한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서한도 직접 보내기도 했다. 다만 한국 일부 보수층이 미셸에게 거는 과도한 기대는 조정될 필요가 있다.
미셸과 숀은 트럼프 시대 공화당 안에 있지만, MAGA의 심장부라기보다는 골드워터와 레이건을 지나온 정통 보수 계열에 가깝다. 트럼프와 가깝지만, 핵심 충성파 그룹은 아니다. 미셸은 반사회주의 성향의 모임에 참여했지만, 동시에 중도 보수 성향의 의원 그룹에도 속했다.
한국에서 누군가 미셸을 자기 진영의 대리인처럼 상상한다면, 그것은 오독일 수 있다.
미셸 지명자의 강점은 다른 데 있다. 그는 직업 외교관이 아니다. 국무부의 오래된 매뉴얼 안에서만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다. 트럼프가 직접 신뢰를 보낸 정치인이고, 의회와 당 조직의 언어를 안다. 여기에 남편 숀의 RNC 네트워크가 더해진다. 서울 대사관과 워싱턴 권력 핵심부 사이의 거리가, 다른 대사들보다 짧아질 수 있다는 뜻이다.
RNC 집행위원회에 앉아 있는 남편의 존재는 미셸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정치적 통로를 열어준다. 물론 이 배경이 그를 자동으로 ‘역대 가장 영향력 있는 주한 미국대사’로 만들진 않겠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을 높이는 조건임은 분명해 보인다.
(사진은 스틸 지명자의 페이스북에 게재된 어린시절 가족 사진이다. 그는 해당 게시물에서 “아메리칸 드림은 나를 만든 원동력이었다”고 적었다. 페이스북 캡처)
한국어를 하고, 한국 정서를 알고, 실향민 자녀 출신 대사라는 점은 매력적일 수 있다. 한미 관계가 거칠어질 때 한국어로 직접 설명할 수 있는 대사는 그 자체로 공공외교의 자산이다. 북한 주민들의 인권이 미북 협상의 뒷자리로 밀릴 때, 실향민의 딸이라는 배경은 작지만 의미 있는 닻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기대만으로 외교는 움직이지 않는다.
트럼프는 한미동맹을 가치보다 비용의 언어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관세, 방위비, 투자 요구. 미셸이 아무리 한국을 이해해도 대사는 대통령의 정책을 집행하는 사람이다. 때로는 자신이 믿는 것보다 더 차가운 메시지를 전달해야 할 수도 있다.
남편 숀을 둘러싼 중국 관련 논란도 부담이다. 과거 중국 정부와 군 관련 인사들이 공화당 인맥에 접근했다는 보도에서 숀의 이름이 거론된 적이 있다. 숀은 이를 강하게 부인했다. 물론 미셸은 의회에서 중국 공산당에 강경한 입장을 취해왔지만, 이 문제가 인준 청문회에서 다시 불려 나올 수 있다.
워싱턴의 청문회장은 오래된 질문을 그냥 묻어두는 곳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민주당이 향후 어떤 반응을 보이고, 미셸이 이 허들을 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지도 관심사)
미셸 스틸 지명엔 미국 보수정치의 긴 흐름, 한인 이민자의 상승 서사, 북한을 떠나온 가족의 기억, 트럼프 시대 동맹 외교의 불안이 여러 겹으로 접혀 있다. 관건은 미셸 지명자가 남편 숀의 그늘과 트럼프의 거래식 외교 사이에서 얼마나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느냐다. 대사는 관세와 방위비, 투자 요구를 전달해야 하는 자리다. 그러나 모든 외교가 숫자와 청구서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약간의 힌트는 보인다. 지난 4월 초 서울을 찾은 사라 로저스 국무부 공공외교 차관이 탈북민들을 별도로 만났고, 그 만남을 방한 중 가장 인상 깊은 순간 중 하나로 꼽아 X에 공개적으로 올렸었다. 미셸도 비슷한 행보를 밟을 가능성이 높다. 실향민의 딸이 대사관저에 탈북민들을 초청해 만나고 격려하는 장면. 그건 오히려 자연스럽다.
문제는 그 장면이 서울의 외교 현실과 마주하는 순간이다. 미셸의 북한 인권 행보는 대북 유화 기조를 보이는 이재명 정부와 마찰을 빚을 수 있다. 탈북민 문제와 북한 인권이 다시 미국 대사관의 언어로 전면에 올라오면, 외교부도 중간에서 난처한 조율을 해야 할지 모른다. (정동영 장관의 표정이 궁금해진다)
미셸의 시험은 결국 이 두 질문 사이에 있다. 트럼프의 청구서를 전달해야 하는 자리에서, 한미 관계를 흔들림 없이 관리하면서 부모가 떠나온 땅을 향해 어떤 말을 남길 수 있을까. 아마도 그 균형이 그를 평범한 정치 임명 대사로 남길지, 기억에 남을 주한 미국대사로 만들지를 가를 것이다
(William Kim/Journalist in Washington 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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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지역의 애국교민들>
<위싱턴 DC 집회>
<로스엔젤레스 한인타운 집회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