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0년 5월 18일 육사생도의 5.16지지 시위를 지켜보고 있다. (왼쪽부터) 박종규 소령, 박정희 소장, 차지철 대위. ⓒ 연합뉴스>
혁명의 설계자 김종필과 지도자 박정희, 1961년 2월 ‘혁명결의’
그 무렵 김종필을 비롯한 군부 일각에선 혁명에 대한 의지가 불타고 있었다. 1961년 2월 19일, 2군 부사령관으로 있던 박정희를 찾아가 “이제는 혁명해야 겠다”고 제안한다. 이날 박정희와 김종필은 동원 가능한 병력을 확인하고 ‘혁명의 결의’를 맺었다.
김종필은 이후 거사 날까지 도서관을 드나들며 프랑스 혁명, 볼셰비키 혁명, 터키 케말 파샤 혁명, 영국의 산업혁명, 이집트 혁명 등 전 세계 혁명사를 연구했다고 한다.
“꽃샘추위가 매서운 1961년 초봄 나는 분주해졌다. 박정희 소장과 대구에서 혁명 결의(2월 19일)를 한 뒤였다. 혁명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출동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전의 정군(整軍)운동은 육군본부 동료들로 충분했다. 이젠 혁명이다. 실병력이 있어야 했다. 그들을 이끄는 야전장교를 포섭해야 했다. 나는 한강 이북, 박 소장은 한강 이남을 맡았다.”
– 김종필 증언록 1권, 42쪽.
김종필이 처음 점 찍어둔 거사 날짜는 4·19 혁명 1주기 날이었다. 학생 시위로 거리가 시끄러운 틈을 타 군이 개시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막상 날짜가 다가오자 군인들이 예상했던 시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거리는 조용했다. 계획은 두 번이나 미뤄졌다.
“첫 번째 4월 19일 계획은 4·19 기념 1주년 행사를 맞아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를 예상하고 준비한 것이다. 시위가 벌어지면 진압군으로 투입되는 혁명 주체세력이 궐기군으로 전환한다는 구상이었다. 기대했던 데모는 일어나지 않았다.
군부 궐기는 자동적으로 취소됐다. 나는 발상과 접근 자세를 바꾸었다. 상황이 조성돼야 거병하는 소극적 방식은 안 되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역사는 스스로 써야 하고 미래는 만들어가야 한다.
이튿날 대구의 박정희 소장을 찾아가 폭동 진압 계획에 편승하려는 소극적 계획을 수정하자고 했다. 우리는 주변 조건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출동할 수 있는 혁명군을 편성하기로 했다.”
– 김종필 증언록 1권, 61~62쪽.
JP가 정한 D데이 H아워는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쿠데타 지도자인 박정희와 설계자 김종필 그리고 제1공수단, 해병1여단, 6군단 30사단·33사단, 특수부대가 작전에 동참했다. 쿠데타가 일어날 거란 소문이 군 외부로 유출되는 일도 있었지만, 김종필은 두렵거나 당황하지 않았다고 한다.
군과 정부가 무관심하고 나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장면 총리는 재임기간 수 차례 쿠데타 관련 첩보를 입수했으며, 장도영 참모총장에게 사실 확인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장 참모총장은 그럴리 없다며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단언했다. 결과적으로 안이한 대처였다.

5월 15일 늦은 오후, 김종필은 6개 공약이 담긴 혁명 발표문을 작성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 잡기 위해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 절망과 기아 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 (군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5월 15일 밤 11시 반, 박정희는 신당동 집을 나와 서울 영등포의 6관구 사령부로 향했다. 거사를 시작한 것이다. 쿠데타군인 해병대와 공수단은 헌병대와 한차례 교전 끝에 한강교를 돌파한다. 그 사이 쿠데타 소식을 접한 장면 총리는 머물던 반도호텔을 떠나 혜화동의 카르멜 수녀원으로 피신했다.
군부가 장악한 남산 KBS 라디오방송국 새벽 5시 혁명 취지문에 이어 오전 9시 장도영 참모총장 명의로 계엄포고문이 전국에 방송됐다
군사혁명위원회 포고 제4호
일, 본 군사혁명위원회는 4294년 5월 16일 오전 7시를 기해 장면 정부로부터 일절의 정권을 인수한다.
이, 참의원·민의원 및 지방의회는 4294년 5월 16일 오후 8시를 기해 해산한다. 단, 사무요원은 존속한다.
삼, 일절의 정당 및 사회단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사, 장면 정부의 국무위원 및 정부위원은 체포한다.
오, 국가기구의 일절은 혁명위원회가 이를 정상적으로 집행한다.
육, 모든 기관 및 시설의 운영은 정상화하고 여하한 폭행 행위도 이를 엄단한다.
– 1961년 5월 17일 자 <동아일보> ‘정권 인수·국회 해산
12·12 군사 혁명의 주역 중 하나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혁명에 긍정적 입장을 취했다.
“1961년 5월16일 새벽, 잠자리에서 일어난 우리는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혁명을 일으킨 주역이 박정희 소장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안심이 됐다. 소대장 시절 사단장으로 모셨던 그분의 인품과 능력을 믿었다.
결코 경거망동할 인물이 아닌 데다 누구보다도 확고한 국가관을 갖고 있는 분이어서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혁명을 주도했으리라는 점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나는 곧바로 서울대 문리대에서 교관을 하고 있는 전두환 대위와 연락을 취했다. 우리 두 사람은 혁명의 성격을 이야기하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중략) 1961년 5월 18일에 있었던 육사 생도 및 장교단의 혁명지지 시가행진은 언론에 크게 보도돼 혁명의 성공을 기정사실로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날 아침 사관생도 800여 명은 교수 훈육관들과 함께 동대문에서부터 서울시청 앞 광장까지 시가행진을 벌였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상권, 116~118쪽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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