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미국 선교사 (3)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Rosetta Sherwood Hall)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 9. 19~1951. 4. 5, 한국명 허을(許乙))은 미국 뉴욕 주 셜리반 카운티에 있는 리버티(Liberty)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아버지 셔우드(R. Sherwood)와 어머니 (P.G. Sherwood)의 딸로 태어났다.
그곳에서 체이스넛리지학교와 뉴욕의 오스웨고 주립학교를 졸업하고 교사자격증을 얻어 1년간 체이스넛리지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했다.
그러나 로제타는 이런 평범한 교사생활에 만족할 수 없었는데, 그때 지역에 방문한 미 감리회 토번 감독과 그의 부인이자 의사인 챈들러의 강연중 “인도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의료선교”라는 말에 감동 받아 의료선교사가 될 결심을 하게 되고, 1886년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해 1889년에 졸업했다.
◊1890년 뉴욕시 메디슨가 빈민의료선교에서 만난 닥터 홀과 닥터 로제타 셔우드
로제타는 졸업 후 감리교 여성 자선의 집에 지원하여 뉴욕 빈민가에서 의료선교사업에 참여하게 된다.
거기서 자신의 미래 남편이 될 윌리엄 제임스 홀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에서 파송후 5년간은 결혼 할 수 없는 규칙이 있어 둘은 1889년 8월 약혼한 후 의료선교사로 활동할 것을 약속했다.
로제타는 처음에는 중국의료선교사로 가려고 했으나 메타 하워드의 후임으로 조선으로 가게 된다.
로제타는 1890년 8월 22일 고향 리버티를 떠나 한국으로 향하여 10월 10일 부산에 도착한 후 10월 13일 제물포에 상륙하여 이튿날 서울에 도착한다.
정동에 있는 스크랜턴의 집에 짐을 풀고 얼마 후 이화학당 근처의 한옥으로 숙소를 옮긴 로제타는 보구여관에서 진료활동을 시작하여 첫날 4명의 환자를 시작으로 열 달 동안 2천명 이상을 치료했다.
조선에서의 결혼, 그러나 남편을 잃다
윌리엄 제임스 홀과 약혼한 로제타는 1892년 6월 27일에 조선에서 벙커 선교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이는 조선에서의 최초 서양 결혼식이었다. 그 후 제임스가 평양에 병원을 설립하고, 로제타 역시 평양으로 떠났다.
◊홀(Hall) 선교사가 평양에서 선교를 하던 집
그의 남편 윌리엄 홀은 평양에서 치료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러나 그 해 청일전쟁이 발발했고 얼마 후 평양은 청일 양군의 결전지가 되었다.
제임스 홀은 신변 위험을 우려한 감리교 서울본부의 빗발치는 귀환 요청에도 불구하고 부상당한 군인들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다며 평양에 계속 머물렀다.
부상자 치료에 혼신의 힘을 다하던 그는 결국 1894년 11월 24일 격무와 발진티부스 감염으로 34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남편이 죽은 후 그 해 12월 로제타 홀에게는 셔우드 홀이라는 두 살 난 아들과 뱃속에 7개월된 아이가 있었다. 그녀는 출산을 위해 미국으로 갔다.
딸 에디스를 출산한 로제타는 귀국하기 전 로제타는 남편의 유산과 친지들의 부의금을 모아 한국에 보냈고, 결국 1897년 1월에는 홀의 유업을 기리는 홀기념병원이 평양에 건립되어 폴 웰(E. Follwell) 박사가 이를 인수 경영하였다.
이 병원은 개원한 지 일년도 안 되어 3천명이 넘는 환자가 진료를 받았다.
그 해 11월 다시 조선에 돌아온 로제타는 서울의 보구여관을 맡아 보다가 1898년 5월 평양으로 파송 받아 평양에서 여자병원인 광혜여원(廣惠女院)을 설립하였고 부녀자와 아동을 위한 의료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병원사업을 위해 헌신하는 동안 또 한번의 비극을 맞이하는데 딸이 풍토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녀는 딸의 시체를 김창식 목사의 등에 업힌채 평양서 양화진까지 걸어서 묻었다.
로제타는 딸을 남편 옆에 묻으며 “하나님! 사랑하는 내 아들 셔우드 홀과 한국에서 평생 사역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했다.
그 때 미국에 있을 때 들었던 “사랑하는 딸아 네 남편 윌리엄 홀이 이루지 못한 조선 사랑을 네가 이루어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떠올리며 선교의 결의를 다시 한 번 다졌다.
◊로제타가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점자책으로, 사진은 첫 장의 영어 서문. 봉래가 점자책을 많이 읽어서 맨질맨질 해졌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로제타와 평양맹학교 졸업생들(사진 출처 국민일보)
최초의 한글 점자를 만들다
본국에서 맹인용 점자사용법(New York Point)을 배운 적이 있는 그녀는 평양에서 의료사업을 할 때 오씨라는 보조원의 어린 딸인 봉래가 앞을 보지 못하므로 점자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로제타는 청일전쟁 후 본국에 가 있는 동안 뉴욕의 맹인연구소를 방문하여 점자법을 좀 더 세밀히 연구하였다.
이때 연구한 점자법이란 뉴욕 포인트 시스템(New York Point System)에다 한글을 적용하여 한국인 맹인들이 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미국에 있는 동안 그것을 위해 몰두했었다.
◊미국인 선교사 알렌이 1885년 4월 10일 고종의 허락을 받아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서양식 병원 제중원(광혜원)의 모습
1897년 광혜여원 방 하나를 내어 자신이 고안한 점자사용법을 이용하여 봉래에게 본격적으로 가르쳤다. 이 것이 한국에서 최초로 실시한 맹인교육이었다.
봉래를 시작으로 지방에서 데려온 학생들을 모아 마가렛 병동에서 본격적인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평양맹아학교가 되었다.
1908년까지 하다가 그녀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어 다음해부터 맹인 전문가인 록웰에게 인계했다.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 해방후 우석대 의과대학으로 새출발 – 고려대가 우석대를 합병 고려대 의학대학으로 새출발
평양의 오마니
로제타는 1917년 서울로 와서 보구여관의 후신인 동대문 부인병원에서 일하였고, 1920년부터 여자의사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는 오늘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으로 발전하였다.
로제타는 1930년 건강상의 이유로 선교사직을 사임하였다. 한국땅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했다.
로제타는 25세 꽃다운 처녀의 몸으로 한국에 와서 40년 동안 여의사와 교육가로서, 이 땅에 젊음과 눈물과 땀과 정성과 애정과 일생을 다 쏟아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과 세 살 난 유복자를 이 땅에 묻어 놓고, 65세의 백발이 되어 한국을 떠날 때에는 외아들과 자부를 자신의 후계자로 세웠다.
그녀가 한국에 와서 첫 10개월 동안 치료한 환자 수가 2천4백 명에 이르고, 처방전 발행은 6천 건이 넘었다고 한다.
미국으로 간 그녀는 1943년에 은퇴하여 뉴저지 양로원으로 들어가 여생을 지내다가, 1951년 4월 5일에 85세로 별세하였다.
그녀의 유언에 따라 로제타 셔우드의 유해는 남편과 딸 에디 마거리트(Edith Margaret, 1895~1898)가 잠들어 있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기독교 신앙 컬럼중에서. 위드코리아 편집국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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