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7일 애나하임에서 인도의 독립기념일 기념식이 있었다.
올해로 72주년을 맞이하는 인도의 독립일은 1947년 8월 15일로서 한국과 2년차이가 나지만 날은 같은 8월15일이다.
마침 미국 순회 강연중인 무소속 이언주의원도 로컬 정치인들의 초청을 받아서 인도공화국 독립 72주년 기념식에 동참하여 인도공화국의 독립을 축하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이언주 의원은 현 캘리포니아 68지국 공화당 하원의원인 최석호 의원과, 내년 3월에 있을 선거에 절치부심 준비를 하고 있는 영김 전 의원과의 만남도 있었다.
1858년부터 1947년까지 영국의 지배를 받아온 인도공화국은 1947년 독립을 맞이하면서 종교적인 문제로 파키스탄과 나뉘어지었는데, 이유는 다르지만 해방과 함께 남북으로 나뉘어진 한국과 흡사한 역사를 갖고 있다.
현재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도와 파키스탄은 분쟁중에 있다.
같은 식민지의 경험을 하였던 인도와 영국과의 관계와, 현재 심화되고 있는 한일간의 대립을 생각하며
페이스북에서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부 교수로서, 저서로는 ‘사진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제국을 사진 찍다’ 등의 저서를 지은 이광수 교수의 글을 발견하였다.
현재 한일의 갈등 때문에 국민들간에도 양분된 생각으로 친일파, 토착왜구니 하는 논쟁중인 분들과 함께 나누었으면 한다..
[인도는 왜 식민종주국영국과 사이가 좋은가?]
마하뜨마 간디는 1940년 이후 여러 차례 영국이 우리와는 친구이니 떠나는 친구를 잘 보내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말 한 바 있다. 이 한마디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답일 것이다.
인도는 약 200년 동안 영국의 직간접 식민 통치를 받았다.
1757년부터 1856년까지는 동인도회사를 통해 나라의 대부분이 시나브로 영국의 지배권 아래로 들어갔고, 그 이후로는 영국 여왕의 직속 지배 아래 들어갔다.
1857년 북부 인도를 중심으로 엄청난 규모의 봉기가 일어나 2년 가까이 지속되었으나 결국 처참하게 진압되었고, 이 때 대부분의 지식인들이나 돈 있는 사람들은 그 봉기에 가담한 자들을 무식하고 역사 발전에 일절 도움이 되지 않는 자로 생각했다.
그들은 영국의 존재를 ‘비록 수탈을 하긴 하나, 나라의 미래를 위해 궁극적으로 필요한 근대화를 시켜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영국이 근대화를 들고 인도 땅에 들어왔을 때 인도는, 나중에 중국이 그랬듯이 엄청난 자기 충격에 빠졌다.
인도의 전통과 문화는 모조리 구태로 내몰렸고, 인도가 나아가야 할 미래는 영국의 처분에 달려 있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영국이 가지고 온 근대화를 찬양했다. 영국 정부는 이런 오피니언 리더들을 규합하도록 했다. 주로 영국 유학파 출신들이 그 대상이었다.
영국 정부는 그들에게 정당을 하나 만들라고 했다. 아무래도 영국에 호의를 가진 사람들이 앞장서서 ‘무식한 백성들’과 ‘그들을 개화시키려 애쓰고 있는 영국인들’ 사이에 가교 역할을 좀 하게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소위 가스 레인지에 달려 있는 안전밸브론이다. 안전밸브가 있어야 가스 폭발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현재 인도의 거대 양당 가운데 하나인 회의당(I) Congress Party(I)의 전신인 인도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다.
인도국민회의는 철저하게 영국 정부에게 건의하고, 정책 시정을 요구하는 그런 성격의 정당이었다.
그러나 20년 정도가 지난 1905년까지 정국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좀 더 급진적인 민족주의자들이 등장했다. 영국 정부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영국에게 식민 지배를 끝내고 떠나라, 라는 종류의 요구는 일언반구 한 적이 없다. 대다수 국민들로부터도 외면당해 그야말로 소수파였다.
영국에 대해 심한 소리를 하면 당내에서 바로 엄청난 비판을 당하고 국민들 대부분에게도 외면을 당했다.
영국은 이 나라 이 백성을 살리려고 애를 써주는 사람들이니 그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야 이 나라에게 도움이 된다는 그런 식이었다.
(인도의 상징 가운데 하나인 인디라게이트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영국을 위해 전사한 장병들을 위한 위령탑이다 @이광수)
인도 민족이 영국에게 이 나라를 떠나라고 한 것은 지배를 당한 지 180년 정도가 지난 1942년부터였다. 그들은 처음으로 영국인들에게 ‘인도로부터 철수하라’를 외쳤고, 1947년 영국인들은 떠났다.
떠날 때 그들은 몇 가지 안전장치를 마련해두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독립 후에도 양국 정부는 지속적으로 우호적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공산화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독립 후 인도는 영연방에 주저 없이 속했지만,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미국과 영국의 편에 서지는 않았다.
인도는 제3세계 비동맹운동을 이끌고 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영연방의 황제 깃발 아래 같이 놓인 형제처럼 가까운 친구 사이는 유지되었다.
한국에서처럼 독립군이나 임시정부도 없었다. 버마에 근거지를 두고 본토 침공 시도를 하려다가 시작도 못해 본 인도국민군 Inan National Army라는 게 있긴 하지만
우리의 경우 상해와 만주 일대에 확실히 존재한 헌법상의 ‘대한민국’ 같은 건 애시 당초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한국사에서와 같은 매국노도 없고, 친일파와 같은 개념도 없고, 역사 청산이라는 것도 없다.
영국 식민 지배는 분명히 ‘강제’였으나 영국인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인도인들의 ‘동의’를 교묘하게 이끌어냈다.
그리고 그 동의는 아직도 유효하다. 그들에게 영국은 아주 좋은 친구 관계이고 그 관계는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식민지 근성 혹은 노예 근성이라 폄하하고 일부에서는 영국의 식민 성격은 일본이나 프랑스 등과는 달라 그렇게까지 폄하할 일은 아니라고 한다]
By 이광수 2017년 11월 04일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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