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5년 런던의 흑사병 창궐 시기를 묘사한 그림 “당신 집의 시체를 이리 내 오시오”
방역이라는 의미의 쿼런틴(quarantine)은 이탈리아어로 ‘40일간’이라는 의미다. ‘40일간’이라는 말이 ‘방역’이라는 의미로 전환된 것은 600년 전 베니스에서부터였다.
도시 국가 베니스는 일단 페스트가 창궐하기 시작하면 항구에 정박된 선박들을 40일간 하선하지 못하게 격리시켰다.
그 후 차츰 ‘40일간’이라는 단어는 방역이라는 의미를 띄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는 많은 작은 도시 국가로 나뉘어져 있었다. 전염병이 창궐할 때마다 그 도시들 사이에는 여행이 금지 되었다. 여행을 하려면 건강 증명 통행증을 소지해야만 했다.
어둡고 좁은 골목과 충충한 운하가 어딘지 모르게 중세의 페스트를 연상시키는 베니스는 과연 전형적인 페스트 발생 지역이었다. 그 흔적이 지금도 매년 2월이면 열리는 카니발이다.
사람들은 새(鳥) 부리 모양의 가면이나 해골 모양의 가면을 쓰고 축제를 벌이는데 이것이 바로 페스트가 창궐하던 중세 시대 ‘죽음의 춤’(danse macabre)의 재현이다.
페스트는 카니발만 남긴 것이 아니다. 꼼꼼한 치사율의 조사와 기록을 포함한, 현대 공중보건의 모든 접근 방식이 이미 1400년에서 1700년 사이에 대부분 정착되었다.
1450년의 밀라노, 1530년의 베니스에서 전염병 창궐에 대한 체계적 모니터와 기록이 시작되었다.
마치 우리나라 대구시 시청 홈페이지에 일일 확진자 수가 게시되듯이, 17세기 영국에서는 교구 내의 사망자 숫자를 포함한 전염병 상황의 기록이 주보 형식으로 일주일마다 공시되었다.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큰 글자 제목과 함께. 이런 과학 정신이 19세기 이후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게 된 이유일 것이다.
흑사병은 사라졌지만 개명천지 20세기에 와서도 판데믹의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1918년 전 세계에서 최소 5천 만 명의 사망자를 낸 스페인 독감이 그것이다. 존 베리가 쓴 ‘대 독감’(Great Influenza)의 첫 장은 필라델피아의 인턴 간호사 앨리스 월로위츠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어느 날 아침 교대 근무를 시작한 간호사 앨리스는 갑자기 아프다고 쓰러졌고, 바로 그 날 밤에 죽었다.
그 후 매일같이 사람들이 스페인 독감으로 쓰러져 죽어갔다. 필라델피아의 31개 병원이 가득 찼고, 환자들은 거금의 뒷돈을 주고도 입원을 하지 못해 집으로 돌아갔다. 수술 마스크를 쓴 경찰관들이 주택가를 돌며 시체를 수습했다. 경찰관도 33명이나 죽었다.
“짐작컨대 거의 모든 집에 환자가 있었다”고 존 베리는 썼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의 대면을 피했고, 꼭 말해야 할 때도 얼굴을 옆으로 돌렸으며, 스스로를 최대한 고립시켰다.”
스포츠 경기는 취소되었고, 극장들은 문을 닫았으며, 아리조나주 프리스콧에서는 악수가 법으로 금지되기까지 했다.
시체 보관 장소가 부족하게 된 필라델피아는 급하게 시체공시소를 여섯 군데 더 늘렸다. 가정집들은 집안에 시체가 있다는 표시로 현관문에 크레이프 종이를 붙여 놓았는데, 그 종이는 거의 모든 곳에서 눈에 띠었다.
1918년 이후 공중 보건 전문가들은 늘 또 다른 빅원(big one)에 대비하라고 촉구해 왔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그 ‘빅원’ 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한국의 경우,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나 의식은 앞으로 많이 바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집단주의는 얼마간 개인주의로 가게 될 것 같다. 지금 현재 한국인들의 의식을 관통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공포다.
마스크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을 못 믿겠다는 불신감의 표현이다. 비록 기침이나 가래 같은 가시적인 증상이 없더라도 무증상의 보균자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밀집된 사람들에 대한 공포는 어쩌면 광우병 시위나 촛불 시위 같은 집단 떼거리의 모임을 차츰 사라지게 하지 않을까.
차분한 이성과 엄격함 그리고 겸손이 새로운 가치로 자리 잡을 것 같다는 예감도 든다. 그 동안 우리 사회는 이성과 거리가 먼 난장판의 사회였다.
정교한 논리나 원칙의 엄격함과도 거리가 멀었다. 사람들의 교만은 하늘을 찔렀다. 과학이고, 법이고, 원칙이고 다 소용 없었다.
좌파이기만 하면, 사회적 약자를 위한다는 정의의 외피만 두르면 모든 것을 마음대로 결정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 오만이 전문가의 무시로 나타났다. 아니 ‘전문가의 무시’라는 것은 올바른 말이 아닐지 모른다. 그들 옆에도 매번 전문가는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전문가들은 권력에 오염된 사이비 전문가였다.
앞으로는 순순한 의미에서의 전문가가 대접 받는 사회가 될 것이다. 인간의 인지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내 개인의 생각이 다 옳을 수는 없고, 다른 전문가의 말을 듣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겸손함이 주류로 떠오를 것이다.
그렇게 될 때 21세기의 판데믹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오히려 축복이 될 것이다.
-박정자 –
서울대 문리대 수학/상명대 교수 퇴직 /출판사 기파랑 대표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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