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선주의 친구 돈 사취 고백이 대부흥 점화>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된 부흥의 불길은 평양, 개성, 서울, 목포 등지로 확산되었고 1907년 1월에는 ‘평양 대(大) 부흥’으로 발전했다. 대부흥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수많은 샛강이 모여 큰 강을 이루고 큰 강물이 모여 대하(大河)를 이루듯 평양에서의 부흥은 그동안 간헐적으로 전개되어 왔던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결집된 것이었다.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안남도 도사경회가 개최되었다. 1,000여명이 회집한 이 집회는 그래함 리, 스왈른, 번하이젤, 윌리엄 헌트, 블레어 등이 강사였다.
길선주 또한 이 사경회의 강사이자 이때의 부흥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렇게 집회가 계속되는 중 1월 6일 저녁 집회에는 무려 1,500여명이 참석하였다. 당시 평양의 겨울은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엄동설한이었으나 뜨거운 집회의 열기를 막지는 못했다.
<사경회가 회개기도회가 되기까지>
처음부터 강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때로 분위기는 냉담했고 알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1월 12일 밤 블레어 선교사가 고린도전서 12:27을 본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의 한 지체’라는 제목으로 설교할 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날은 더욱 분명했다.
영적 분위기가 회중을 압도했고 길선주 전도사가 “맛을 잃은 말라빠진 사람들아!”라고 외치며 신자다운 삶을 살지 못했음을 설교했을 때 회개의 기도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14일에는 정오 기도회를 열고 성령의 역사를 간구했다.
오늘 우리가 평양 대부흥이라고 부르는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는 사경회 마지막 날인 14일과 15일에 일어났다.
14일 저녁 길선주는 회중 앞에서 1년 전 세상을 떠난 친구로부터 재산을 관리하도록 부탁받았으나 그 일부를 사취했던 죄를 고백했다. 이 고백이 회개의 역사를 불러일으켰고 평양 대부흥의 내적 동인이 되었다. 길선주의 회개에 이어 청일전쟁 당시 자기 아이를 죽였던 한 여인이 살인의 죄를 고백했다.
이때부터 회중들의 죄의 고백은 계속되었고 수많은 이들이 은밀히 숨겼던 죄를 하나씩 고백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회개 기도는 마치 바다에 이는 성난 파도소리 같았다.
김양선은 이렇게 기록했다. “인간이 범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죄는 거의 다 고백되었다. 사람의 체면은 이제 다 잊어버리고 오직 이때까지 자기들이 배반했던 예수를 향하여 ‘주여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울부짖을 뿐이었다.
국법에 의해 처벌 받든 또 그로 인해 벌을 받거나 죽임을 당하든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소원이었다.”
그래함 리는 1월 15일자로 기록한 보고서에서 “어제 있었던 집회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집회였다.”고 했다.
조지 맥쿤 또한 1월 15일자로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 브라운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매우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있다. 장대현교회에서 모인 지난 밤 집회는 최초의 실제적인 성령의 권능과 임재의 모임이었다.
우리 중 아무도 지금까지 이전에 그 같은 것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우리가 웨일스, 인도에서 일어난 부흥에 대해 읽었지만 이번 장대현교회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지금까지 읽었던 어떤 것도 능가할 그런 것이었다.”라고 썼다.
<죄 고백이 행동으로 옮겨가다>
15일 저녁에도 성령께서 비상하게 역사하셨다. 선포된 말씀에 응답하여 교인들은 밤새워 눈물로 기도했고 온갖 죄악들이 숨김없이 고백되었다. 눈물은 가슴을 적셨고 애통하는 회개는 격류를 이루며 평양 거리에 파도치고 있었다.
이 회개의 물결을 목격한 여 선교사는 이렇게 썼다. “저런 고백들 그것은 마치 감옥의 지붕을 열어젖힌 것이나 다름없다. 살인, 강간 그리고 상상할 수도 없는 모든 종류의 죄가 고백되었다.” 블레어는 이 당시 회개가 진정한 의미의 죄의 청산이라고 보았다.
“대부흥의 회개는 눈물을 흘리며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남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들은 그 손해를 끼친 사람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는 사과를 하고 과거에 남의 재물이나 돈을 훔친 사람들은 그것을 갚아 주었는데 비단 교인들에게뿐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그렇게 하였다.”
18,19세기 영국, 미국의 부흥 역사에 예시된 것처럼 죄에 대한 회개는 부흥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다.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부흥의 역사는 평양 전역으로 퍼졌고 교파를 초월하여 다른 교회로 그리고 신학교로 확산되었다. 부흥의 불길은 곧 타 지방으로 번져갔다.
그래함 리에 의해 선천으로, 스왈른에 의해 광주로, 윌리엄 헌트에 의해 대구로 전파되었다. 길선주는 의주와 서울로 갔다. 또 평양신학교 학생들에 의해 부흥의 소식이 각지로 전파되었고 부흥의 역사는 신의주, 선천 등 북한 지역과 대전, 공주, 대구, 목포 등 남한의 다른 지역으로도 확산되어갔다.
이와 함께 성경연구와 기도, 전도, 봉사, 봉헌의 생활이 강조되었고 사경회가 열리는 곳에는 공적인 회개와 더불어 영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런 부흥은 1907년 4월까지 계속되었다.
1908년에는 만주와 중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때의 부흥은 한국교회의 수적인 성장과 내적인 신앙 성숙을 가져왔고, 전도운동과 선교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사회 변혁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03년 이후 1907년 대 부흥은 교회연합운동을 가능케 했고 기도회 중심의 한국교회의 성격을 형성했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영향과 결과>
첫째,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의 대부흥운동은 말씀과 기도를 통한 철저한 회개운동이었다. 1884년 알렌이 입국한 이후 이처럼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한반도 전역에 임한 적이 없었다.
둘째, 개인의 영적각성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개혁으로 이어졌다. 여성의 지위향상, 신분타파, 교육의 열기, 의식개혁, 세계관의 변혁, 민족의식, 미신타파, 조선인에 대한 선교사들의 시각 변화 등 부흥운동은 사회 전반에 놀라운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소돔과 고모라로 통했던 기생과 환락의 도시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바뀌었으며, 조선에 대한 명칭이 ‘Choson’에서 ‘the Chosen’(선민, 選民)으로 바뀌었다.
셋째, 만주와 중국 부흥의 모체가 되었다. 중국인 교역자 호만성(胡萬成), 장석정(張賜禎)이 1907년 평양에 입국하여 일주일간 체류하면서 부흥운동의 현장을 직접 관찰하고 돌아가 전했는데 그 결과 만주에서도 평양에서 일어난 강력한 회개와 영적 각성운동이 일어났다.
넷째, 1903년 원산부흥운동이 발흥하고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거쳐 1909년 백만인 구령운동이 일어나기까지 한국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거듭했다. 그것은 세계선교의 기적이었다.
마치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을 통해 예루살렘교회가 토대를 구축했던 것처럼 한국의 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가 세계선교 역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성장을 가져 온 중요한 요인이었다.
다섯째, 해외선교 운동이다. 장로교의 경우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될 때 이기풍 선교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후 한국 교회는 중국 블라디보스톡과 일본에 계속 선교사를 파송하여 처음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틀을 다져갔다. 그 원동력은 부흥운동이었다.
여섯째, 부흥운동은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을 성령 안에서 하나로 묶어주었다. 그 결과 선교사들과 한국교회는 교육사업, 의료사역, 해외선교, 복음전도, 문서선교, 성경번역에 이르기까지 교파와 교단을 초월 민족복음화를 위해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1907년 평양 대부흥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난 100여 년간의 한국교회 영적 각성과 복음 전파를 견인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글쓴 이 / 이상규(고신대 역사신학 교수) 출처 / 국민일보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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