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초대교회 회개운동〉
1. 교회사의 증거
교회 부흥의 역사에서 회개는 언제나 출발점이었다.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교회 개혁운동은 “오직 말씀으로(Sola Scriptura!), 오직 믿음으로(Sola Fidei!),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오직 그리스도로(Solus Christus!), 오직 교회로(Sola Ecclesia!)” 구호로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신앙의 본질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타락한 믿음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초심으로 돌아가는 신앙 운동이었다.
요한 웨슬레(John Wesley, 1703~1791)가 회개와 회심 후 성령운동을 통하여 감리교를 세웠다.
같은 시기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와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을 중심으로 대각성 운동(Great Awakening Movement)을 일으켰는데 그 중심은 회개였다.
특히 에드워즈 목사가 1741년에 커넥티컷주 엔필드(Enfield, Connecticut)에서 천막집회를 인도하면서 저녁성회 시간에 “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있는 죄인들 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 설교는 참석한 수천명 성도들이 회개 하니 성령의 불이 떨어져 교회가 크게 부흥 되었다.
1734~36사이와 1740~1742년 두 차례에 걸쳐 부흥운동이 있었다. 2차 대각성 운동 역시 대학생들 중심한 회개 운동에서 발원되었다.
이의 영향으로 19세기 말 무디(Dwight L Moody)와 생키의 부흥운동과 피어슨 박사와 와일더(Robert Wilder), 모트(John Mott)가 주도한 대학생 자원선교(Student Volunteer Movement)로 선교의 불길이 타올라 수천명 대학생과 신학생들이 해외선교에 헌신하게 되었다.
1886년부터 무디가 구체적인 훈련을 시작한 ‘대학생 자원운동’에는 162개 대학교에서 2,106명이 선교사로 작정하는 놀라운 결실을 맺었다
‘대학생 자원 봉사 운동’과 무디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은 북장로회 목회자들의 요람이던 시카고 매코믹신학교과 프린스턴신학대학원 동창생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Sameul A. Moffet(마포삼열), Daniel L. Gifford, William M. Baird, Sr.(방위량), Graham Lee(이길함), William L. Swallen(소안론), S. F. Moore(무어), James E. Adams(아담스), Cyrill Ross(로쓰), Charles Bernheisel(번하설), William M. Blair(배위량), William M. Barrett, Alexander A. Pieters, Carl E. Kearns, Charles Allen Clark(곽안련) 등이다.
그래서 한국 초기 선교사들은 회개와 선교에 불타는 가슴을 안고 한국에 왔던 것이다.
2.한국 교회의 초기 회개운동
20세가 전후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지리적 정치적 상황이 한국교회 회개운동과 연관이 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뒤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고종의 퇴위, 1910년 한일합방, 1911년 105인 사건에 이르기까지 이 시대 조선의 역사는 비운의 역사였다.
미국의 유명한 외교가 포스터(John W. Foster)가 증언한 것처럼 당시 한반도는 강대국들이 노리는 “나봇의 포도원”이었다. 러시아, 청, 일본 등 강대국들의 식민야욕 앞에 조선정부는 힘없이 무너져 내렸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한반도는 전쟁터로 돌변했다.
이 시대를 살아간 민중이라면 이구동성으로 민족이 의지할 유일한 대상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암울한 시대적 환경이 백성의 심령을 옥토로 만들어 준 것이다. 1890년 채택된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근간으로 사경회가 널리 시행되었는데, 이 사경회가 부흥운동을 위한 영적각성의 토양을 제공해주었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세계적으로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1904년 이반 로버츠 중심의 웨일즈(Wales)부흥운동, 1904년 호주부흥운동, 1905년 인도부흥운동, 1906년 미국 LA 아주사에서 오순절운동 등 전 세계적으로 부흥운동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이 시대 한국의 부흥운동은 전 세계적인 부흥운동의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20세기 초엽에 전 세계적으로 이 같은 놀라운 부흥운동이 연속된 것은 돌이켜 볼 때 세계선교를 앞당기시기 위한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였다.
이 시대만큼 선교가 활발하게 진행된 적이 없으며, 그 세계선교 가운데 눈에 띠게 두드러진 것이 아시아 선교였고, 그 아시아 선교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한반도였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 구령운동에 걸쳐 부흥운동이 회개에서 시작되었다. 20세기를 시작하면서 한국교회에 점화된 세차례의 부흥운동은 지도자들의 회개에서 점화가 된 것이었다.
1903년 원산에서 발원하여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에 이른 초기 한국교회 부흥운동은 한국 토착교회의 교세 성장을 이끌어냈을 뿐 아니라 신앙과 신학의 성격과 내용을 결정지은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글쓴이: 윤사무엘 목사 (감람원선교신학원 총장), Th.D. Ph.D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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