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초대교회 회개운동〉
1. 원산 부흥운동(1903~1906년)
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원산지역 주재 선교사들이 모여 가진 기도회 동안에 발흥한 원산부흥운동은 3년 동안 지속적으로 유지되면서 1907년 1~2월 평양에서 ‘대폭발'(big bang) 하게 했다.
원산부흥운동이 발흥했던 기도회는 두 명의 무명 여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중국의화단 사건으로 원산으로 피신해온 여 선교사 화이트(Mary Culler White)와 카나다 장로교 출신 여선교사 맥컬리(Louise Hoard McCully)가 선교사들과 한국인들 가운데 부흥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 기도회 소식이 주변에 알려지면서 다른 선교사들도 하나 둘씩 기도회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차제에 공개적으로 기도회를 갖기로 하고 의료 선교사 로버트 하디(Robert A. Hardie 河鯉泳, 1865~1949) 선교사에게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지 3번의 강의를 부탁했다. 부탁을 받은 하디가 강의를 준비하다 말씀과 만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것이다.
▲ 하디 선교사 가족
하디는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출생하여 토론토대학 의과대학에 재학 중 열풍처럼 번지고 있던 ‘대학생 선교 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을 접하고 1890년 봄 대학을 졸업한 후 토론토대학교 학생 기독교청년회(YMCA) 파송으로 한국에 왔다.
그러나 1896년 6월 선교비가 중단되어 잠시 귀국하였다가 2년 후인 1898년 5월 미국 남감리회 선교부 소속으로 다시 한국에 왔다.
그는 개성 삼포막에서 의료사업을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후에 남성병원이 되었다. 1899년 8월부터 서울에 머물면서 강원도 선교를 담당하게 되었고 1900년 10월 남감리회 중국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그 해 12월 원산으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함경남도와 강원도 북부 지역 선교를 담당하게 되었다.
1903년에 원산에서 전국으로 확산된 원산부흥운동의 불길을 지피게 된다.
하디는 그 내면에 학력에 대한 교만함,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교만함, 영국시민이라는 백인우월주의, 한국인에 대한 편견과 인종차별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성령께서 이 모든 것을 깨닫게 해주신 것이다. 이미 기도회 시작하기 전부터 말씀을 통해 은혜를 경험한 하디는 기도회를 인도하는 동안 내내 울면서 동료 선교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통회하며 회개했다.
하디 자신이 고백했듯이 그것은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경험이었다. 그러나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그는 자신의 죄악과 잘못을 토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하디의 고백은 동료 선교사들의 회개로 이어졌다.
그 다음 주일 창전감리교회 예배 때 하디는 자신이 맡고 있는 회중들 앞에서 또 다시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자신의 교만과 성령 충만하지 못함과 한국인들에 대한 인종편견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디의 고백은 한국인들의 회개운동으로 이어져 회개를 동반한 성령의 역사가 1903년 8월 이후 계속되었다.
◊하디 선교사의 묘(양화진)
스칸디나비아 선교회 소속 프란손이 원산을 방문하여 인도한 장감침(長監浸)연합사경회 동안에도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나타났다. 그 후 하디가 인도하는 집회에서 젊은이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계속되었다.
최종손, 강태수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얼마 후 로스 선교사의 어학 선생 진천수가 주일 예배가 끝나자마자 회중 앞에 일어서더니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한 것이다. 한국인들만 회개한 것이 아니었다.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후 하디의 성품과 인격과 삶은 이전과 확실히 달랐다. 하디는 자신이 인도하는 집회에서 성령의 역사가 계속되자 자신을 부흥의 도구로 부르셨다는 확신을 갖고 자신에게 그토록 실패감을 안겨주었던 강원도 지경터로 향했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그곳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경터 근처 새 술막에 도착한 하디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그가 인도한 12일의 지경터 집회 동안 1903년 8월에 있었던 것처럼 놀라운 성령의 역사,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다.
하디가 자신의 말을 직접 빌린다면 “사경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결코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하디는 이어 개성, 서울로 향했다. 주님은 예외 없이 이곳 집회에서도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셨다. 배재학당 학생들이 통회하는 역사가 나타났다.
이와 같은 부흥의 열기에 힘입어 1904년 6월에 들어 처음으로 부흥회라는 말이 통용되기 시작했다.
하디는 안식년을 떠나기 전 10월에 서울과 제물포와 평양 세 곳에서 집회를 인도했고 이들 집회 가운데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하디가 안식년을 떠난 후 1905년에 접어들어 개성을 중심으로 영적각성이 계속되었다.
◊1905년 2월 평양 사경회 앞줄 왼쪽 다섯 번째부터 길선주 김종섭 이기풍 목사. 가장 뒷줄 중앙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이 마포삼열 선교사. 아래 사진은 평양 숭실학당의 운동회 풍경. (새물결플러스 제공)
1905년 9월 장로교 4개 선교회와 감리교 2개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함께 모여 “한국복음 주의선교공의회” (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조직하고 하나의 민족교회를 꿈꾸며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힘을 모으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이들 모두는 한국에 가장 필요한 것이 영적부흥이라고 확신하고 1906년 신년 들어 신년부흥회를 전국적으로 열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새로운 성도의 영입보다 기성 성도가 먼저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것은 기성 성도들이 은혜를 받으면 전도는 저절로 이어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06년 서울과 평양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열린 신년부흥회를 통해 영적각성의 움직임은 한층 강화되었다.
이런 가운데 1906년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평양선교사사경회가 개최되었다. 강사는 원산부흥운동의 중심인물인 하디였다.
요한 1서를 본문으로 한 하디의 일련의 메시지는 그곳에 참석한 많은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큰 도전을 주었다. 하디는 은혜를 받기 전 얼마나 자신이 교만했는지, 그런 자신에게 어떻게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자신을 변화시켜주셨는지를 진솔하게 회중들에게 전해주었다.
평양 장대현교회 담임 목사 이길함 선교사부터 어머니 로제타 셔우드 홀의 손을 잡고 그 집회에 참석했던 12살의 어린 셔우드 홀(Sherwood Hall)에 이르기까지 온 회중들은 하디의 설교를 통해 큰 은혜를 경험했다. 이날 하디는 이렇게 외쳤다:
“인간이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잘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심과 믿음의 부족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아무리 높은 이상도 영적인 힘이 없다면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러한 영적인 힘은 계속적인 기도로만 얻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의 체력이 날마다 음식물을 섭취함으로써 유지되는 것 같이 우리의 영적인 강건함도 날마다 기도를 통해서만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리의 목적은 인간의 영광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으로 그 초점이 바뀌어 질 것입니다.”
하디의 메시지는 어린 셔우드 홀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주었다. 본래 서양에 가서 사업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하디의 설교를 듣고 자신 역시 부모님들처럼 의료 선교사가 되어 한국에서 사역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한국에 최초의 결핵 요양원을 설립하여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건졌다. 한국의 크리스마스 실(Christmas seal)도 그가 처음 만든 것이다.
▲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결핵 퇴치를 위해 헌신한 캐나다 선교 의사 셔우드 홀(왼쪽)과 그가 발간한 1934년 크리스마스실 ‘아기 업은 여인’(오른쪽). /고려우표사
존 스톤을 강사로 모시고 열린 서울선교사 사경회에서도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웨일즈와 인도 부흥운동의 현장을 목도하고 한국을 방문한 존스톤은 웨일즈와 인도에서 일어난 놀라운 부흥운동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의 외침은 그곳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에게 부흥에 대한 열망을 심어주었다.
많은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은 이 소식을 듣고 부흥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존스톤은 웨일즈의 부흥이 통성기도에 있었다는 소식도 전해주었다. 그 후 통성기도는 한국에 뿌리를 내려 한국교회의 기도로 정착되었다.
존스톤은 서울 사경회가 끝난 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경회를 인도하며 다시 한번 웨일즈와 인도의 부흥운동 소식을 전해주었다. 웨일즈 부흥운동의 주역 이반 로버츠(Evan Roberts)처럼 부흥의 주역으로 쓰임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자 길선주 장로가 손을 번쩍 들었다.
영적각성을 경험한 길선주는 이때 큰 은혜를 경험하였고, 1906년 12월 12일부터 22일까지 선천에서 열린 황해도도사경회 때 주강사로 단에 올라 능력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 현장에 참석했던 김익두 조사가 길선주의 메시지를 통해 큰 은혜를 받았다.
▲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시발지 장대현교회의 당회원. 왼쪽부터 김선두 목사, 정의로 장로, 마포삼열 목사, 길선주 목사, 이길함 목사, 옥경숙 장로, 위참석 장로. 뒤줄 왼쪽부터 김성택 목사, 박치로 장로, 안봉주 목사. (사진제공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놀라웠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시작하기 전 장대현교회 담임목사 이길함, 수석장로 길선주, 그리고 길선주의 뒤를 이어 한국교회 부흥을 이끌어갈 김익두가 은혜를 받은 것이었다.
또한 1906년 10월 남장로교 선교구 목포에서 발흥한 놀라운 성령의 역사는 이 땅에 부흥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긍정적인 신호로 인식되었다.
프레스톤이 맡고 있는 목포 선교구에서 하디와 쌍벽을 이루는 부흥사 저다인을 초청해 열린 부흥집회에서 강력한 부흥이 임했다.
마치 외과 의사가 메스를 들고 암세포를 도려내는 것처럼 성령께서 그곳에 참석한 회중들 심령 깊숙이 숨겨진 온갖 죄악들을 도려내신 후 치유의 향유가 각 심령 위에 부어졌던 것이다. 이어 목포 전역에서 놀라운 통회와 죄용서가 이어졌다.
평양지역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목포에서 일어난 소식을 듣고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양에서 열리는 평안남도 도 사경회 동안에도 이 같은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저녁마다 모여 기도회를 가졌다.
이들은 그해 크리스마스 휴가도 반납하고 부흥을 사모하며 기도했다.
글 쓴이:윤사무엘 목사 (감람원선교신학원 총장), Th.D.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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