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초대교회 회개운동〉
◊평양 장대현교회의 회개운동과 대부흥운동
평양대부흥운동은 아시아에서 강력한 성령의 현시였다. 길선주 장로는 산정현교회에서 1906년부터 새벽기도를 시작했다. 평양대부흥운동은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안남도 전역에서 올라온 1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되었다. 도 사경회가 열렸다.
1월 6일부터 저녁집회가 시작되었다. 낮에는 평양시내 성도들은 참석이 허용되지 않았으나 저녁에 열리는 저녁집회에는 평양시내 성도들도 참석이 허용되었다. 그 놀라운 평양대부흥운동은 사경회 기간, 특별히 사경회 마지막 14일과 15일 이틀 동안에 발흥했다.
12일 블레어가 말씀을 전할 때 은혜가 임했으나 13일 주일 저녁집회는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고포드의 말을 빌린다면 마치 놋쇠로 된 지붕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기도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막는 것처럼 답답했고, 마치 사탄이 온 회중을 압도한 것처럼 그날의 영적분위기는 너무도 차가웠다. 오죽했으면 그날 말씀을 전했던 길선주가 “너희 다 죽었어” 라고 반문할 정도였다.
길선주장로는 물론 모든 선교사들은 이렇게 사경회가 끝나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14일 정오기도회에 모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은 그들의 기도를 외면치 않으셨다.
그날 헌트가 말씀을 전한 후 담임목사 이길함 선교사가 나와 통성기도를 요청하자 청중들이 기도를 드렸다. 통성기도는 전날과 완연히 달랐다. 통성기도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을 다 돌려보내고 600명이 남아 새벽 2시까지 간절히 기도했다.
사도행전 이후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평가받는 평양대부흥운동은 바로 그 때 모인 남은 자 600명 가운데 임했다.
회개를 동반한 강력한 성령의 역사는 모인이들 모두가 처음 체험하는 강력한 부흥이었다. 이날 회개의 포문을 연 사람들은 평양 장대현교회 길선주장로였다.
길선주는 1년 전 세상을 떠난 자신의 친구의 재산을 정리하면서 당시 100달러에 해당하는 거금을 착복한 것이다. 친구의 아내에게 이를 말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성령께서 그의 심령을 비취시자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날 길선주는 자신이 은혜를 막는 성령의 임재를 막는 아간이라며 많은 회중 들 앞에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그의 회개는 마치 뇌관에 불을 당긴 것처럼 그곳에 모인 온 회중들의 회개로 이어졌다. 그 현장에 있었던 이길함목사는 다음날 어제의 성령의 역사를 보고하면서 어제 있었던 그 집회는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 없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15일 조지 매큔(George McCune) 역시 놀라운 성령의 임재가 현시했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미국 북장로교 총무 브라운에게 보고했다.
“우리는 매우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권능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장대현 교회에서 모인 지난 밤 집회는 최초의 실체적인 성령의 권능과 임재의 현시였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지금까지 이전에 그 같은 것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우리가 웨일즈, 인도에서 일어난 부흥 운동에 대해서 읽었지만 이번 장대현 교회의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지금까지 읽었던 그 어떤 것도 능가할 것입니다.”
◊조선의 선교사들 사진 왼쪽부터 올리버 에비슨, 언더우드, 사애리사 선교사
그 현장에 있었던 선교사들이 이구동성으로 고백하는 것처럼 자신들이 처음 경험하는 놀라운 성령의 임재가 나타난 것이었다.
15일 선교사들은 정오에 모여 어제 있었던 그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곳에 참석한 선교사들 가운데서도 하늘 문을 여시고 성령을 부어주셨다.
선교사들 가운데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만약 한국인들에게만 성령이 임했다면 평양대부흥운동은 반쪽만의 부흥일 것이지만 성령께서는 선교사들 가운데서도 똑 같은 은혜를 베풀어주셨던 것이다. 이들은 마지막 남은 15일 저녁에도 성령의 역사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은혜를 사모하며 기도하기는 한국교인들도 마찬가지였다. 15일 저녁 집회는 이미 집회가 시작되기 전 영적분위기가 이전과 달랐다. 이날 말씀을 전하는 길선주장로의 얼굴은 거룩함으로 불타고 있었고, 그의 메시지를 들은 동료 장로의 증언을 빌린다면 그의 얼굴은 길선주가 아니라 예수였다.
그가 회개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그날 그곳에 모인 이들은 말씀 앞에 부복하여 자신들 안에 은밀하게 숨겨진 온갖 죄악들을 다 토로하였다.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어떤 죄악도 숨길 수 없었다. 사람이 지을 수 있는 모든 죄들이 그날 공객적으로 고백되었다.
장대현교회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평양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숭덕학교와 숭현여학교에서도 회개를 동반한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장대현교회는 사경회가 끝났는데도 16일 수요일 기도회 때, 다시 20일 주일 예배 때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계속되었다. 평양장대현교회의 성령의 소식은 곧 평양 전역으로 다시 한반도 전역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평양시내 전역에 성령의 불길이 타올랐다. 그 부흥의 불길은 교파를 초월하여 평양시내 교회들로 확산되었고, 평양시내 거의 모든 미션스쿨(Mission Schools)들도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다. 특히 숭실대학과 평양장로회신학교 개강 사경회 때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임하였다.
이것은 장차 한국교회를 이끌어갈 젊은이들과 목회자들을 영적으로 무장하고 새로 조직될 한국교회를 축복하시려는 비상한 성령의 섭리였다.
장대현교회에 임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길선주, 헌트, 블레어, 이길함, 스왈른, 편하설은 부흥의 불을 가지고 한반도 전역으로 흩어졌고, 성령께서는 이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한반도 전역에 부흥의 불을 지피셨다.
특별히 길선주는 평양대부흥운동의 불을 전국으로 가지고 간 주역이었다. 길선주는 제일 먼저 서울로 달려가 “승동(勝洞), 연동(蓮洞), 수구문(水口門), 상동(尙洞), 제교회(諸敎會)에서 집회(集會)”를 인도했고, 그가 인도하는 서울 집회마다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헌트를 통해 대구에서도 강력한 영적각성운동이 일어났다. 곧 서울, 대구, 대전, 공주, 신의주, 선천 등 전역에서 요한계시록을 강해하면서 회개의 부흥이 퍼져나갔솟다. 이 부흥의 불길은 다시 만주와 중국으로 놀랍게 번져나갔다.
평양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에 놀라운 영향을 미쳤다. 첫째 놀라운 영적각성운동이다. 평양대부흥운동은 말씀과 기도를 통한 철저한 회개운동이었다.
1884년 알렌이 입국한 이후 이처럼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한반도 전역에 임한 적이 없었다. 둘째 이 시대 부흥운동은 개인의 영적각성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개혁으로 이어진 것이다.
여성지위향상, 신분타파, 교육열, 의식개혁, 세계관의 변혁, 민족의식, 미신타파, 조선인에 대한 선교사들의 시각 변화에 이르기까지 부흥운동은 사회전반에 놀라운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소돔과 고모라로 통했던 기생과 환락의 도시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바뀌었으며, 조선에 대한 명칭이 Choson에서 선민(the Chosen, 選民)으로 바뀌었다.
셋째 만주와 중국 부흥의 모체가 되었다. 중국인 교역자 호만성(胡萬成), 장석정(張賜禎)이 1907년 평양에 입국하여 일주일간 체류하면서 부흥운동의 현장을 직접 관찰하고 돌아가 전해주었는데 그들 가운데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현시되었다.
같은 해 봄에 중국 목사 유전악(劉全岳) 등 2인이 평양에 방문하고 돌아가 그곳 교회 지도자들과 목단봉(牧丹峰)에서 중국에도 부흥의 역사가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을 때 만주에서도 평양에서 일어난 강력한 회개와 영적각성운동이 일어났다.
케넷 라토렛(Kenneth S. Latourette)의 지적대로 만주에서의 “놀라운 종교적 운동”은 평양대부흥운동과의 접촉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넷째 놀라운 교회성장이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이 발흥하고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거쳐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이 일어나기까지 한국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거듭했다. 그것은 세계선교의 기적이었다.
돌이켜 볼 때 비록 한국선교가 1884년 9월 20일 호러스 알렌의 입국으로 개신교가 시작되었지만 실제로 한국교회가 교회로서 틀을 다진 것은 대부흥운동을 거치면서였다.
마치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을 통해 예루살렘교회가 토대를 구축했던 것처럼 한국의 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가 세계선교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성장을 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었다.
다섯째 해외선교운동이다. 장로교의 경우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될 때 이기풍 선교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후 한국교회는 중국 블라디보스톡 일본에 계속해서 선교사를 파송 처음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틀을 다져갔다. 그 원동력은 부흥운동이었다.
여섯째 연합운동이다. 부흥운동은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을 성령 안에서 하나로 묶어주었다. 그 결과 선교사들과 한국교회는 교육사업, 의료사역, 해외선교, 복음전도, 문서선교, 성경번역에 이르기까지 교파와 교단을 초월 민족복음화를 위해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부흥운동은 지난 100년간의 한국교회 영적각성과 복음전파를 견인하는 출발점이었다.
복음이 전해진 후 거의 100년이 넘도록 교회가 성장하고 국내외적으로 복음전도를 견인할 만큼 구령의 열정에 불타는 것은 한국교회가 끊임없이 부흥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시 한번 평양대부흥운동과 같은 영적각성이 이 민족 가운데 일어나기를 사모하며 기도회를 가졌다.
특히 길선주는 박치록 장로와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 새벽기도회를 열었고, 세 명의 남감리교 선교사들은 의기투합하여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성령을 부으셨다. 이들의 노력에 힘입어 복음주의연합공의회는 100만명구령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글쓴 이:윤사무엘 목사 (감람원선교신학원 총장), Th.D. Ph.D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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