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하와이 이민자 김이제 목사 가족 1903년⌋
◊1903년 1월 14일 첫번째 이민선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 땅에 도착한 최초의 한국인 김이제제 목사 가족
제물포를 떠난 갤릭호가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면서 한국인들의 미국 이민이 시작됐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할 목적으로 남성 56명, 여성 21명, 어린이 25명이 탑승했다.
이 가족사진에는 김이제 목사와 동생 찬제씨, 김 목사의 아내와 처제(오른쪽부터). 당시 이제씨는 설교사였고 동생 찬제씨는 8세에 불과했다.
찬제씨는 동생이 이민권을 받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아들로 신고했다.
찬제씨는 12세 때부터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며 주경야독해 훗날 한인 첫 엔지니어, 건축가로 활동했다. 1938년 새로 헌당된 하와이 한인기독교회는 김찬제씨가 설계한 건물이다.
◊미국 이민역사가 시작한 후 최초로 설립된 1918년 이승만 대통령이 세운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한미우호통상조약 제6조에는 ‘양국 상인은 서로 왕래 교류를 하면서 토지와 건물을 매매할 수 있다’며 적법한 상행위를 규정하고 있다. 이로써 두 나라 민간인의 상업교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초기 대미관계는 상인끼리의 왕래보다는, 공식적인 한국의 노동 이민자들이 하와이로 진출한 것이 더욱 의미가 크다. 또한 그 숫자는 적지만 조선의 인삼 장사들이 미국에 첫발을 디딘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1899년 호놀루루에 도착한 인삼 상인들은 신의주 출신의 최동순, 장승봉, 강군철, 이재실, 박성근 등이었는데, 이들은 중국인으로 분류가 되었고 한국 민간인으로 하와이 이민국에 기록된 첫번째 입국자는 1900년 1월 15일 상륙이 허가된 양백인, 김일수 두 사람이었다.
이들은 ‘차이너’호를 타고 왔는데 물론 인삼을 파는 상인이었다. 같은 해 1월 23일 상륙이 허가된 한국인이 있었는데 이름은 김신유, 김원육, 최신국이었다.
유교적 전통에서 살아온 이들이 대대로 살아온 고향과 가족을 뒤로 하고 신천지를 찾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주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7천여 한국인의 하와이행 노동이민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두 가지를 들 수가 있다.
첫째는 대외적인 요인으로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노동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와이 농장주인들은 이미 중국으로부터 노동자를 수입했고, 그 다음으로는 일본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시 한국인 노동자를 입국시키기로 생각을 한 것이다.
둘째, 국내적인 이유로서, 계속된 혹독한 가뭄과 흉년으로 노동자나 농민들이 극심한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세리(稅吏)들의 압박으로부터의 해방과 자녀 교육문제에 대한 고려도 생각할 수 있다.
또 다른 설명으로는 그 당시 조선사회 일각에서 일어나고 있던 ‘개국진취운동'(開國進取運動)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한다.
◊초기 하와이 이민자
하와이 사탕수수재배협회는 1902년 5월 한국인 노동자를 모집하려고 존 대쉴러를 파견했다. 그를 통해서 주한 미국공사 호레이스 알렌에게 ‘지금 하와이로 이민을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조선의 조정을 설득하도록 건의를 했다.
이 뜻을 받아들인 고종은 이민사업과 신문화 교류사업을 장려하기 위해서 1902년 8월 20일 수민원(授民院)을 설립하고 해외정세에 밝은 민영환(閔泳煥)을 수민원 총재에 임명하여 하와이 이민사업을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서울, 인천, 부산, 원산 등지에 개발회사가 설립되고 이민자를 모집했는데, 초기에는 너무 허황된 내용 같아서 별다른 호응이 없었다.
◊1903년 하와이 이민 모집 광고 전단
이민자의 참여가 부진하자 동서개발회사는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설득작업을 벌여 나갔다.
이들은 계절의 차이가 분명한 한국에서는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에 어려움이 따르지만, 일년 내내 기후가 온화하고 상쾌한 하와이로의 이주는 부유한 생활을 보장하고, 매월 15달러의 수입을 책임진다는 광고를 하였다.
◊1900년의 인천 내리교회 성도들
특히 설득작업을 위해서 당시 인천 내리교회(內理敎會)의 조지 하버 존스목사(한국이름 조원시)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존스목사는 내리교회의 한국인 신도들을 통해서 그들의 친지나 이웃사람에게 하와이 이민을 설명했으며 서울 등지를 직접 다니면서 교인들의 응모를 권유하기도 했다.
하와이 이민은 수민원에서 발행한 여권인 집조(執照)를 가지고 노동계약에 의해서 이루어진 첫 해외이민 이었다.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에서는 수민원 총재 민영환 등의 환송을 받으며 한국 역사상 첫 공식 이민선이 눈물 속에 미지의 땅 하와이를 향해서 떠났다.
이들은 일본 고오베(神戶)에 도착하여 다시 신체검사를 받았다. 병이 있는 사람 20명은 그곳에 남게 되고 건장한 체력을 가진 청년 등 101명이 통역원과 함께 미국상선 갤릭호(Gaelic)를 타고 태평양을 가로 질러 하와이로 향했다.
◊최초의 이민선 ‘갤릭호’
20여 일의 항해 끝에 이민자들은 1903년 1월 13일 새벽 하와이 호놀룰루 제2부두에 도착했다. (하와이 한인사회는 해마다 이날을 조상숭모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이민국에서 신체검사를 받는 과정에서 일행 가운데 4명은 입국이 허락되지 않았으나, 나머지 97명은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국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두번째 이민은 상선 캡틴호로 63명의 한국인이, 세번째 배 코리아호로 62명이 속속 하와이에 도착했다. 이와 같이 시작된 노동 이민 대열은 1903년에 모두 10척의 상선에 1,133명을 하와이로 실어날랐다.
1904년에 33척의 배에 3,434명이 그리고 1905년에 16척으로 2,659명이 출국하여, 3년간 (1903 ~ 1905) 모두 65척의 이민선에 총 7,226명이 하와이로 떠난 셈이다.
그 중에는 남자가 6,048명이고, 부녀자가 637명, 아이들이 541명이었다. 후에 이들 중 964명은 다시 귀국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초기 개척자들은 낮이면 사탕수수밭에서 노동을 했고 밤이면 농막에 들어가 밤을 지샜다. 너무 심한 중노동과 정신적 고통 등으로 병이 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매일 10시간씩 농장일을 했고 하루 임금은 69센트를 받았다. 한숨과 눈물에 젖은 노동생활이 계속되었는데 이들 개척자들은 미주 한인 사회건설과 조국 광복운동의 주춧돌이 되었다.
한편 하와이의 노동이민이 중단된 원인은 두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는 새로운 경쟁자가 하와이에 나타나는 것을 먼저 온 일본인들이 두려워하기 시작한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조국을 움직여서 조선으로부터의 이민 금지령을 내리게 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부족했던 일본인 노동자를 러일전쟁이 끝나자 다시 일본으로부터 얼마든지 모집해 올 수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점차 하와이 노동자 생활에 실망을 하고 미국본토로 이주하는 한국인들이 늘어났다.
1905년부터 1907년 사이 모두 1,003명이 캘리포니아 등 본토로 이주해감으로써 한인 사회는 호놀루루에서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로 점차 확대되어 나갔다.
한편 하와이 이민에 이어, 또 다른 1천 여명의 한국인들은 멕시코를 향해서 노동 이민을 떠났다. 멕시코 이민은 영국인과 일본인의 술책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노예와 같은 비참한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한 채 무작정 새 땅을 찾아 나선 것이다.
1905년 3월 6일 제물포에는 멕시코 유카탄 반도로 가는 배가 정박해 있었는데 남자 802명, 여자 231명 등 모두 1,033명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1개월의 항해 후에 메리다지방 24개의 어저귀(에니껜)농장으로 배치가 되었는데 하와이보다 더욱 어려운 작업조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4년 노동 계약이 끝나서야 첫 농장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가 허락되었는데, 이들 멕시코 이민 중 일부는 다시 더 나은 새 땅을 찾아서, 쿠바의 농장으로까지 흘러 들어간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21년 3월 11일 멕시코를 출발한 291명의 한인은 쿠바 맛나치에 도착해서 농장 노동자로 흩어져서 살아갔다.
쿠바와 멕시코까지 흘러 들어간 노동 이민은 한때는 하와이나 미국으로 다시 이주할 계획까지 세웠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잊혀진 종족’처럼 중남미의 어느 하늘 아래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미 3세나 4세까지 뻗어간 초기 이민 후예들은 한국말과 문화를 잊어버린 채 원주민에 동화되어가고 있다
위드 코리아 편집국
참조: Designersparty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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