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독립선언서와 1920년 3월 26일 됴쿄 형무소에서 출감한 독립선언의 주역들 1946년 북한의 3‧1절 행사
1946년 북한의 3‧1절 행사
1946년 2월 18일, 북한을 장악한 소비에트와 공산정권은 평양 역 앞에서 3‧1절 기념식을 거행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평양의 교회들은 참가를 거부했고 장대현교회에서 독자적으로 기념예배를 감행했다.
이유는 북한 공산정권이 3·1운동이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의 영향을 받아서 시작되었고, 33명의 민족주의자들이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이 주도한 계급투쟁이라 주장했기 때문이다.
북한 정권은 3·1운동이 공산혁명의 결과라고 주장했고 인민봉기로 각인시키기 위해 이 같은 선전을 강화하고 있었다.
공산정권은 기념식에 불참하거나 3‧1운동의 내용에 관해 자신들이 말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많은 불이익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북한의 기독교회는 3·1운동의 역사성, 곧 기독교가 민족운동을 이끌었고 그 정신이 기독교로부터 나왔다는 자부심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일 성수를 이유로 북조선 인민위원회 선거에 불참 의사를 공개적으로 표명했고 별도의 기념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북한 공산당은 교회를 향해 ‘건국의 비 협력자’요 ‘친미파’, ‘반동 결사체’라며 모진 핍박을 가했다. 결국 기독교회는 북한 지역에서의 모든 지도력을 상실했고 북한 공산정권에 협조하지 않은 목회자들은 처형당했다.
죽지 않으려면 공산주의를 찬양하며 변절을 선언하거나, 남한으로 몸을 피해야 했다. 그런 이유로 20만 명에 가까운 기독교인들이 남한으로 내려왔다. 재산과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지만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고 한국 기독교의 역사성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런데 북한이 3‧1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이라고 우기는 것에는 1919년 일본 도쿄에서 일어난, 재일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을 근거로 한다.
2‧8독립선언문에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이 언급이 되고 참여한 학생들 중에 사회주의자들에 기울어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2‧8독립선언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재일 유학생 600여 명이 도쿄 간다(神田)에 있는 조선 YMCA 회관(현 재일본한국 YMCA)에 모였다. 백관수가 대표로 이광수가 쓴 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을 낭독했다.
유학생 최팔용은 ‘조선청년독립단’발족을 선언했다. 이 선언이 끝났을 때 유학생들은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며 한일 강제병합 조약의 폐기, 한국의 독립 선언과 함께 민족대회 소집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런 요구들이 실천될 때까지 혈전도 불사할 것이라며 소리를 높였다. 거리로 뛰어나가 독립 만세를 외치려 할 때 일본 경찰이 들이닥쳤고 학생들은 강제로 해산 당했다. 독립의 열망을 삭일 수 없었던 학생들 일부는 일본 황궁 옆의 히비야 공원으로 옮겨 만세를 외쳤다. 60명의 학생이 검거되었고 최팔용 등 8명의 학생이 기소되었다.
도쿄 유학생들을 자극했던 것은 윌슨 대통령이 발표한 14개 조항의 평화 원칙의 내용이 알려지고, 고베에서 발행되던 영자지 저팬 애드버타이저(The Japan Advertiser)가 보도한 내용 때문이었다.
기사에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 세 사람이 한국 독립을 제소하기 위해 파리강화회담에 파견되었다는 내용,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이 독립청원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했다는 것, 뉴욕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동맹회의 2차 연례총회에서 약소민족의 발언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들어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의 한국인들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30만원을 모금했다는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의 기사도 이들을 고무시켰다.
독립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유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발표하기로 했다.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해 독립선언서를 만들었고, 독립청원서와 선언서를 일본 주재 각국 대사관·공사관과 일본 정부의 각 대신, 일본 귀족원 중의원, 조선 총독 및 각 신문사에 보냈다. 그리고 오후 2시 조선 YMCA 회관에서 유학생 대회를 열었던 것이다.
유학생들이 주도한 독립운동은 일본 경찰의 강경한 진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의 의거는 국내로 즉각 알려졌고 3‧1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민족대표로 일컬어지는 한국의 종교인들을 자극했고, 이광수가 쓴 독립선언서는 삼일독립선언서의 기초가 되었다.
120 여 명의 학생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고국으로 귀국해 경향 각지에서 만세 시위에 앞장섰고 이광수 등은 중국 상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기도 했다. 특히 이광수는 영문으로 번역한 2‧8독립선언서 전문을 윌슨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냈고 상해에 있던 영문뉴스 Daily News와 China Press는 이를 자세히 보도했다.
2.8독립선언의 핵심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행처럼 번지고 있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적 사상은 일본 근대 지식사회를 열광시켰다. 그때 세계적 사조로 등장하고 있던 유럽 사회주의와 1917년에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이 일본 진보 지식사회에 함께 퍼져 나갔다. 그런데 당시 일본의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를 잘 알지 못했다.
와세다(早稻田) 대학과 도쿄대학에 사회주의 사상 연구회가 만들어졌다. 진보적 젊은 지식인들에게 사회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세계적 흐름에 앞서 나가는 일로 여겨졌다. 이들 젊은 학생들은 러시아 혁명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채 급진적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여기에 도쿄에 유학 온 한국인 유학생들도 예외일 수 없었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거세게 불고 있던, 새로운 사조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공산주의 사상이 적지 않은 재일 유학생들을 들뜨게 했던 것이 사실이다.
2.8독립선언서 내용 중 “군국주의적 야심을 포기하고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러시아는 신 국가의 건설에 종사하는 중…”의 구절이 들어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한국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던 때였고 제1차 한인사회당을 결성한 이동휘와 박진순도 공산주의로 전향하기 이전이었다. 따라서 3‧1운동에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영향은 없었다.
2‧8독립선언은 ‘정의’ ‘자유’ ‘평화’ 신부적(神賦的) 인간관에 따른 개인의 존엄성이 핵심이었다. 학생들은 이것을 이룰 수 있는 체제가 ‘민주주의’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일본 경찰도 재일 유학생들이 ‘미국 대통령의 이른바 자유 평등 민족자결’에 물들었다고 분석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독교회와 YMCA 등 기독교 기관이 부추겼다고 판단했다. 한국 유학생들이 천황에게 집중되어 있는 일본의 사회관과 그 정신을 거부했던 것이고, 이러한 것이 기독교의 복음 때문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2‧8독립선언의 정신과 기독교
3‧1운동 이후, 정부를 표방하며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4월 13일에 공식 출범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이외에 서울의 ‘한성정부’, 인천의 ‘조선민국임시정부’, 노령의 ‘대한국민의회’, 평안도 지역의 ‘신한민국정부’, 천도교가 중심이 되었던 ‘대한민간정부’, 간도의 ‘고려임시정부 등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상해 임시정부와 노령의 대한국민의회 이외는 정부의 형태를 갖춘 곳은 없었다.
1919년 5월에 미국에 있던 안창호가 상해로 오면서 정부통합을 주장했다. 그의 노력으로 거의 모든 독립운동 세력이 규합될 수 있었고 각 세력들은 1919년 9월 11일 상해 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이때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 중심제로 바꾸었으며 미국에 있던 이승만에게 초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요청했다. 그리고 노령에서 활동하던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안창호를 내무총장으로 선출했다.
이로 말미암아 비로소 상해 임시정부는 한국의 대표적인 정부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 통합된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3일에 제정된 헌법 제1조, 곧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을 헌법으로 채택했다. 그런데 이 헌법 제1조는 곧 2‧8독립선언의 정신 고스란히 담겨있다.
1919년 4월 13일에 제정된 상해임시정부 약법 제1조는 2‧8독립선언서를 만든 이광수에 의해 주장되었다.
2‧8독립선언 이후, 도쿄에서 상해로 망명한 그는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했고 조소앙, 신익희와 함께 헌법 제정을 담당했다. 이때 그는 임시정부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을 주장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그런데 이광수는 헌법 제1조가 기독교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확인해 주고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기독교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밝힌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도 미국 기자와의 회견에서 미국 기독교가 한국에 민주주의 의식을 심어주었다며 이광수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1887년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은 기독교를 ‘민주주의의 기초’로 보았고 미국을 ‘민주공화국의 개조(開祖)’라고 밝힌 바 있다. 이후 한국의 근대 지식사회는 ‘미국’ ‘민주주의’ ‘기독교’를 하나로 보았다. 그리고 재한 선교사들은 이 같은 사실을 선교를 통해 한국 사회에 각인시켰다.
도쿄의 유학생들 대부분은 미션스쿨이나 교회, YMCA 등 기독교를 통해서 자유 평등사상을 습득했고 의식화되어 있던 사람들이다. 그런 이유로 2‧8독립선언에는 대한제국 복구나 존왕(尊王) 의식은 없었다. 인간을 우상화하려는 의식이 없었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계급적 투쟁 의식도 없었다.
하나님 아래 누구나 평등하다는 의식이 강했고, 오직 개인의 권리와 타인의 존중이 강하게 주장되었을 뿐이다.
2‧8독립선언의 사상은 3‧1운동으로 연결되었고, 한국 근대 지식사회는 이들의 생각을 받아들였다. 한국 기독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도쿄 유학생들의 주장에 적극 동조한 것도 젊은 학생들이 갖고 있던 민주주의 의식과 개인 존엄이라는 기독교 정신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복음과 민주주의가 함께 지향하는 ‘자유, 질서, 공적 정의’ 의식을 같이 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김명구(연세대 교수)
김 명 구 교수는 감리교 목사로 연세대학교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교수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서울YMCA 월남시민문화연구소 소장 및 감리교회 산하 한국선교전략연구소 부소장을 겸하고 있다.
저서로는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서울장신50년사>, <소죽 강신명 목사>,<영주제일교회 100년사>, <서울YMCA운동사 100-110>,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100년사>(공저), <복음, 성령, 교회- 내한선교사들 연구>등 십여 편이 있다. 2018년 6월에 복음주의 관점에서, 해방 이전의 기독교 역사를 다룬 <한국기독교사1>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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