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교회가 있었던 부근에 세워진 개선문>
고정(高町)교회는 1923년에 세워진 교회로서 고정교회를 담임했었던 교역자들을 살펴보면 해방 전에는 이동희 목사, 김영로 목사․ 정명채 (鄭明采) 목사․ 이의주 목사․김인준 목사님 등이 고정교회를 담임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 가운데 비교적 자세한 기록으로 남겨져 있는 정명채 목사는 평안북도 선천 출신으로 정주 오산 중학을 졸업하고 의주 양실(養實)학교 교사로 있을 때, 일어난 3․1 만세운동 당시 의주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중심인물 가운데 하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정 목사는 출옥 후 학교 교사직을 그만 두고 교회의 조사(집사)생활을 시작했고, 1930년에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25회로 졸업한 후 첫 목회는 삼등(三登)교회에서 했고, 1939년에 두 번째 목회지로 고정교회에 부임했다.
또 다른 목회자여던 김인준(金仁俊) 목사는 1920년대에 미국 유학을 다녀온 후 해방 후에 평양장로회신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을 때 교장을 역임했다.
김인준 목사는 ‘평양신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던 1946년 3월에 1919년 3.1 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장대현 교회의 3․1 만세 기념예배를 준비하던 중, 예배를 금지시키려던 공산 정권에 의하여 장대현 교회에 모여 있던 목사들을 예배일 사전에 구금시키는 일이 있었는데, 이 때 김목사는 공산정권에 강경하게 맞서다가 끌려 나가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북한에는 6․25 한국전쟁 당시 납북당한 남한의 교회 지도자들이 다수가 있었는데, 이들은 평양 근처에 분산 수용되어 있었고 대다수는 순교를 당하였다.
<강량욱 목사>
그 후 평양 고정교회에는 김일성의 인척이고, 북한의 부주석과 조선기독교도련맹을 설립한 강량욱(康良煜) 목사가 부임하게 되었다. 강량욱은 김일성의 외할아버지인 강돈욱(康敦煜)의 육촌 동생으로 김일성의 외숙부라고 알고 있지만, 정확하게는 김일성의 외종조부이다.
그가 창설한 조선기독교도연맹은 1999년초에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이라고 이름을 바꾸었고, “조그련” 이라고도 불리운다.
강량욱은 평양 칠골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숭실중학을 졸업하고 숭실전문을 경제적 문제로 중퇴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강량욱은 고향에 있는 창덕(彰德)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는데, 김일성이 어린 시절에 이 창덕학교에 이년 가까이 다녔는데 강량욱이 담임 교사였다.
<소년 김일성의 동상과 함께 복원 된 평양의 창덕학교>
창덕학교는 현재 북한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이 되었고, 학교 안에 예전 창덕학교 교사를 복원해 놓았다.
강량욱은 장대현교회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평양장로회신학교에 다녔고 1943년에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38회로 졸업한 후 목회자가 되었다. 그는 부흥사 스타일의 목회자로서 ‘제2의 김익두’라는 말도 들었다고 한다.
1946년 2월 김일성은 북한을 통치하기 위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고 서기장, 실무책임자로 강량욱을 임명했다.
김일성이 목사였던 강량욱을 굳이 택한 이유는 그 당시 북한에서는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기독교 세력을 공산 정권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그 때부터 강량욱은 공산정권의 실세로서 북한이 공산화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강량욱은 ‘조그련’을 만들어서 북한의 교회를 공산정권에 예속시키는 일을 하였고 북조선림 시인민위원회 서기장 일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고정교회를 계속해서 담임하고 있었다.
이 때 남한에서 정치공작대라는 이름을 가진 무장 행동대가 평양에 들어가서 공산정권의 요인들을 습격해 나갔는데 1946년 3월 13일 밤에 강량욱의 집이 피습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피습에 강량욱의 큰 아들과 딸은 총격에 의해 현장에서 죽었으며, 부인과 강량욱은 부상을 당하였지만 목숨은 구하게 되었다. 당시 생존하게 된 14세였던 강량욱의 작은 아들은 ‘조그련’ 위원장으로 재직하다 2012년 1월에 세상을 떠난 강영섭(康永燮) 목사이다.
남한의 애국 열사들의 정치공작대의 공격 당시 강량욱의 집을 방문하였다가 생존한 사람 중 강병석 목사가 있었다. 그의 딸 강세영은 얼마전까지 대동강 구역의 옥류가정예배처소로라는 거짓 북한의 가정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국의 대표적 좌파 기독교인 단체인 NCCK은 절기에 조그련과 함께 남북공동기도문 발표하고 있다>
고정교회의 주소는 1938년 주소록에 평양부 기림리(箕林里) 56번지 4호였다. 기림리는 지금은 일부는 평양 모란봉구역 개선동으로, 일부는 평화동으로 변경되었다.
고정교회의 맞은편 언덕에는 박대선(朴大善) 목사가 담임을 하였던 서평양감리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박대선 목사는 월남 후 1960년와 70년대에 연세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했다.
편집 출처: “유관지의 북한 3000여개”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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