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부흥을 경험했으나 시대적 아픔 속에 사라진 서문밖교회>
서문밖교회는 1909년 3월 14일 장대현교회에서 분립하여 평양시 하수구리에 설립 되었다. 교회 설립 직후 1913년까지 김선두(金善斗) 목사와 마펫 선교사와 함께 동사목사로 사역을 하다 1916년 숭실전문 졸업생이었던 김선두(金善斗) 목사가 담임으로 사역을 하였다.
김선두 목사는 평양 3.1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일제에 의하여 구금된 후, 1922년부터 황해도 출신의 정일선(丁一善) 목사와 동사목사로 사역을 하다, 1923년에 교회내의 문제로 인하여 김선두 목사와 정일선 목사는 함께 사임하였다.
사임한 김선두 목사는 평양의 다른 교회에서 사역을 하였고, 정일선 목사는 황해도 안악읍교회에 부임해서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김선두 목사는 1930년 중국으로 건너가 교회와 신학교 교수로 일하다가, 다시 평양으로 들어와 신사참배 반대 운동으로 다시 감옥에 구금되었다.
정일선 목사는 일본 당국이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교회를 떠나 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다가 8ㆍ15 해방 뒤에 다시 평양으로 와서 산정현교회를 담임했다. 정 목사는 공산당의 박해에 굴복하지 않고 교회를 이끌어 나가다가 6.25 직전에 체포당했고, 북한군이 평양에서 후퇴할 때 순교했다.
김선두 목사와 정일선 목사의 뒤를 이어서는 김영준(金永俊) 목사가 부임했고, 1929년에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인 임종순(林鍾純) 목사가 평양 서문밖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평양 서문밖교회를 통해서 세워진 교회와 학교가 많았는데, 학교는 숭덕(崇德) 학교와 숭현(崇賢)학교가 있다.
교회는 평양의 서장대(西將臺)교회,대타령(大駝嶺)교회,현암리(玄岩里)교회, 남신가리(南新街里)교회, 북봉수리(北烽岫里)교회,주촌(朱村)교회 등이 서문밖교회를 통해서 세워졌다.
*한국교회가 겪은 격랑의 역사 그 한 가운데 있었던 서문밖〔西門外] 교회
서문밖교회는 중요한 교회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수차례의 장로교 총회와, 여러 가지 중요한 모임들이 이 교회에서 많이 열렸다.
조선이 복음을 받아들인 지 50년이 되는 해가 되었던 1934년을 장로교 23차 총회를 ‘희년총회’라 명명한 총회가 서문밖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이런 영광을 가졌던 서문밖 교회는 한국 기독교의 치욕의 시간도 함께 공유하게 된 교회이기도 하다.
일제의 사복경찰이 교회당 안팎을 포위하고 강대상 아래에는 경찰간부 수십 명이 긴 칼을 차고 앉아있고, 총대 좌우에는 경찰관 두 명씩이 앉아 있었고, 무술경관 백여 명이 교회당 안에 포진해 있는 가운데 열린1938년 장로교 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었는데, 그 장소가 바로 서문밖교회 였다.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의하고 발표된 성명서>
당시 총회 전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목사들은 사전에 일본 경찰에 의해 미리 구금된 상태에 총회가 열렸는데, 신사참배는 한국 기독교의 치욕적 사건의 하나이다.
영광과 치욕이 교차되었던 평양서문밖교회에서 해방 직후인 1946년 2월에는 평양노회 면려청년대회가 해방 후 최초로 열렸고, 1950년 3월, 공산정권의 박해가 점점 심해질 무렵에 평양 서문밖교회는 다시 명예롭지 못한 일을 결의하는 장소로 쓰였다.
공산정권에 협력하는 장로교 교역자들이 서문밖교회에서 모임을 갖고 이 모임을 장로교 33차 총회라고 명명했는데, 그 총회에서 모든 교회가 북한공산정권에 협력하는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할 것을 결의하였고, 기독교도련맹에 가입하지 않는 교역자는 파직시키기로 결의하였다.
12년 전에 열렸던 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목사는 교회에서 추방하기로 결의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북한의 교인들은 1950년8월 5일 서문밖교회에 모여 북한이 전쟁에서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회를 열기도 했다.
당시 1950년 8월 7일자 북한의 ‘로동신문’을 보면 이 기도회에서 “각 교회에서 반드시 미 제국주주의자들을 우리 강토에서 몰아내기 위한 정의의 성전에서 영용한 우리 인민군대가 하루속히 완전 승리하도록 하나님께 진실한 마음으로 필승 기원의 례배를 드리자”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세 달여 뒤 1950년 10월 29일에는 평양을 탈환 한 UN군과 국군을 환영하는 예배를 드린 곳이 서문밖교회이다.
<6․25 전쟁 중 일시수복된 평양에 들어가서 서문밖교회의 주일예배에서 설교한 한경직 목사>
1950년 10월 29일에 역시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남한교회의 사절단과 선교사들이 모여 주일예배는 한경직 목사가 이사야서 60장 1절,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라는 말씀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를 했다.
이처럼 서문밖교회는 한국 근현대화 속에서 영광과 치욕의 세월을 보낸 교회이다. 그 이유 때문인지 평양의 장대현교회, 산정현교회. 남산현교회와는 달리 서문밖교회에 대하여는 단 한편의 논문도, 단 한권의 소책자도 남아 있지 않다.
현 세대의 교회들의 모습속에서 깊게 상고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설립 당시 평양 서문밖교회의 주소는 평양부 하수구리(下水口里) 109호였다. 하수구리라는 이름은 빗물이 흘러들어가는 하수구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곳에는 지금 평양 만수대 예술극장이 서 있다. 만수대 예술극장은 북한을 소개하는 화보나 TV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규모가 큰 분수공원을 끼고 있는 극장이다.
<서문밖교회가 있던 자리 부근에 세워진 만수대 예술극장>
한국 기독교의 영광과 치욕을 함께 담고 있었던 평양서문밖교회 자리는 북한의 공산정권들을 위한 공연장인 ‘평양만수대예술극장’ 이 서 있다.
이곳의 현재 행정구역은 평양시 중구역 서문동(西門洞)으로 변경되었다.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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