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천읍교회 2대 담임자인 김윤점 목사의 「김윤점 목사의 신앙일기」>
풍천읍 교회는 황해도 송화군(松禾郡) 풍해면(豊海面) 성상리(城上里)에 있었는데, 풍해면은 후에 풍천읍이 되었고, 이 지역은 사과를 비롯하여 과일들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었다.
풍천읍 교회는 평양에서 이주한 이면주(李冕周)에 의하여 1895년에 설립이 되었고, 지리적으로 평양과 가까웠던 관계로 평양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사무엘 마펫, 그래함 리 등 선교사들이 합류하여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특별히 풍천읍 교회의 초대 장로였던 한치순 장로는 황해도 일대의 재령군에 상거동(上巨洞)교회, 강촌(江村) 교회, 안악군에 덕산(德山)교회, 대동(大洞)교회, 금산(金山)교회, 봉산군에 당포동(唐浦洞)교회, 모동(慕洞)교회, 신천군에 정녀동(貞女洞)교회를 세운 헌신된 장로였다.
그는 풍천읍교회에서 세운 ‘인재를 기르는 학교’라는 뜻을 가진 양재(養材)학교의 교장으로도 수고를 하였다.
풍천읍 교회는 초기에 평양에 주재하던 쿤스 E,W. Koons(한국이름 군예빈(君芮彬) 선교사) 커. W. C. Kerr (한국이름 공위량 孔韋亮 선교사), 베어드 W. M. Baird(한국이름 배의림(裵義林) 선교사) 등이 교회를 돌보았다.
한국인 교역자들은 1914년부터 풍천읍교회를 담임하기 시작했는데 초대 담임자는 장덕상 (張德尙) 목사로서, 그는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4월 11일 풍천읍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21년에 부임한 김윤점(金允漸) 목사는 2대 담임 목사로서, 1938년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모진 고문을 받았고, 고문 후유증으로 순교하였다.
<김태석 목사의 아들인 3․1 운동의 실무를 맡았던 48인 가운데 한 분인 김원벽 선생>
풍첩읍 교회의 3대 목사는 정원형(鄭元衡)목사였고, 4대 담임 목사로 김태석(金泰錫) 목사가 1927년에 부임하였는데, 김태석 목사는 해방 후 공산정권에게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연희전문, 지금 연세대학 재학 중에 3․1 운동에 앞장서서 만세시위를 성공시켰던 독립운동가 김원벽(金元璧)이 김태석 목사의 아들이다.
해방 후 1945년 9월에 풍천읍 교회는 중국 동북지역 심양지역의 봉천 신학교를 졸업한 황금천(黃金泉) 목사가 5대 담임으로 부임을 하였다.
황금천 목사가 부임 후 풍천읍교회는 황 목사의 지도하에 반공운동, 특별히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앞장섰고, 황목사는 월남하여 군목 1기생이 되어 군복음화에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제6대 담임은 1946년에 부임한 이근형(李根亨) 목사였는데, 공산치하에서 어려운 형편 가운데에서 목회를 하던 중, 당시 공산정권에 의하여 창립된 북조선 기독교도련맹이라는 친공산정권 단체에 의하여 모진 핍박과 수난을 당하였다.
이런 여러 가지 일로 인하여 풍천읍교회는 반공운동의 선봉에 섰던 교회로 유명하였고, 풍천읍교회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해서 동지회’라는 반공조직을 만들어 활동하다가 교인 대다수가 체포되어 모진 옥고를 치루었다.
<순교자 원춘도 목사>
풍천읍 교회의 마지막 담임목사는 1949년에 부임한 원춘도(元春道)목사로서, 그는 6․25 당시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현재 풍천읍 교회의 행정구역은 황해남도 과일군 세교리(細橋里)로서, 세교리 농경지의 92%가 과수원으로서 사과, 배, 복숭아를 생산하고 있는 지역이다.
풍천읍교회는 1951년 3월에 폭격으로 파괴된 것으로 확인되었고, 6.25전쟁 당시 군산으로 피난을 왔던 풍천읍 교인들이 세운 교회가 군산의 군산 제일장로교회이다.
<황해남도 과일군 지도>
자료출처: 유관지 목사의 북한교회 이야기.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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