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일과 국권회복일은 다르다
임시정부의 서울 이전 아니었다
이승만 말이라도 아닌 건 아니다
하필이면 김일성과 비교하다니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장에서 맥아더와 나란히 선 이승만 대통령(1948. 8. 15.)>
광복(光復)은 “잃었던 국권은 도로 찾음”의 뜻을 갖는다(동아 새국어사전). 이 같은 사전의 풀이가 옳다면 광복의 날은 1945년 8월 15일이 아니라 1948년 8월 15일이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8‧15광복’을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되찾은 사건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내일 정부가 주최하는 것은 공식적으로 ‘제78주년 광복절’ 기념식이다.
45년에 우리는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됐다. 그리고 만 3년 후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해방 후 3년간의 미군정 기간을 거쳐 마침내 국권을 회복한 것이다. 그렇다면 올해 8‧15는 78주년 해방일, 75주년 광복절이라고 해야 맞는다. 처음부터 잘못 센 것은 아니었다. 광복 운동 때나 대한민국 출범 전 후로도 다들 잘 알고 옳게 썼다.
그런데 1950년의 제2회 광복절 행사 때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가 칼럼이나 저술을 통해 상세히 잘 설명해 주고 있다(저서: 『건국전후사』, 2019, 대추나무/칼럼: “광복 70주년?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바로잡자”, 2015. 8. 4).
해방일과 국권회복일은 다르다
이치로 따지자면 양 교수의 주장이 백 번 옳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를 바로잡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잘 알고 있다가 깜빡 오인해서 잘못 쓰게 됐다면 즉각 바로잡는 게 바른 태도다. 진작 과오를 알았으면서도 오히려 잘못된 쪽을 따른 것은 체면 때문인가 고집 때문인가.
정부와 관련학계가 열린 자세로 정정을 하면 될 일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기념일,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수립 기념일’로 구분하는 게 어려울 까닭이 없지 않은가.
올해는 또 다른 문제가 대두됐다. 지난 6월 22일 취임한 이종찬 광복회장이 ‘대한민국 105년’이라는 연호를 들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는 취임사에서 “광복회는 전 민족이 바라는 국가정체성을 바로 세워야 한다”며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한 1919년을 대한민국의 원년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대해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가 그달 30일 인터넷언론에 기고한 “이종찬 광복회장에게…1919년 건국설 거두시라”는 제목의 칼럼으로 반박했다.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 출범이 우리 대한민국의 수립이었다는 주장은 분명한 역사왜곡입니다. 임시정부는 어디까지나 임시정부이지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권능을 내외로 인정받는 정식 국가가 아닙니다.”
“1919년 건국설은, 문재인 같이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고 주장하는 맹목적 통일지상주의자들 일부가 민족지상주의를 내세워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훼손하고 국민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내놓은 주장임을 모르십니까?”
이 같은 이 명예교수의 질타에 대해 이 회장은 지난달 3일 광복회 홈페이지를 통해 격한 어조로 반응했다.
‘당치도 않는 요청을 다시는 나 말고도 누구에게도 하지 마시기’를 강력하게 우정 어린 설득으로 회신하고자 합니다.”
“선생의 공개서한을 읽으면서 선생은 근본적으로 나의 말뜻을 잘못 인식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나는 ‘대한민국 원년은 1919년이라’ 했지 ‘대한민국이 1919년에 건국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1919년을 기준하면 4352년 전 이미 건국한 나라입니다.
기미년 3·1독립선언서를 보세요. ‘조선건국 4252년 3월1일 조선민족대표’ 이것이 독립운동 하셨던 모든 분들의 일치된 건국년도입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똑같이 주장하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건국년도를 1919년으로 하겠습니까?”
임시정부의 서울 이전 아니었다
해명이 그럴듯하긴 한데 ‘대한민국 원년’과 ‘건국 원년’이 다르다는 건 옹색한 궤변으로 들린다. 대한민국이 그해, 그러니까 임시정부 수립의 해로부터 시작됐다면서 그냥 원년일 뿐 건국은 아니라는 게 무슨 뜻인지 짐작이 안 된다.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바뀐 첫해이니 그해가 민주국가로서의 원년이라고 말하면서도 건국은 아니라고 한다. 이건 억지다. 그게 바로 건국인 것이다.
단군왕검이 세운 나라가 지금껏 이어지고 있으니 새로운 ‘건국’은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계속성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뜻의 말도 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성립· 명멸했던 왕조국가 모두 ‘개국(開國)’이라는 말을 썼다.
새로운 왕조의 개창(開創)이 곧 개국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전의 왕조를 부인했던 것은 아니다. 역성혁명을 일으켜 전 왕조의 무능·부패·타락·포악에 신음하던 백성을 구했을 뿐 나라를 없애버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회장은 한일협정 때 일본에 의해 1948년 건국론이 그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됐다며 이 교수를 공박하기도 했는데, 그건 일본 측의 주장일 뿐 우리가 그에 구애되거나 구속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 일본의 억지까지 끌어들여 자기 논리의 무기로 삼는 것은 너무 군색하다. 이런 논리야말로 일본을 거들어 주는 것은 아닐까?
<남북협상 기간 김일성(왼쪽)과 함께 걷고 있는 김구. (사진/주간조선)>
대한민국은 상해 임시정부의 서울 이전이 아니었다. 임시정부는 임시정부였을 뿐이다. 그 정부가 해방되어 서울로 옮겨온 것이 아님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더욱이 임시정부의 상징이었고, 끝까지 지켜냈던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 수립을 극구 반대했다.
그는 정부가 세워질 때까지도 반대의 뜻을 굽히지 않으면서 남북협상에 매달렸다.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동일체론을 주장하려면 김구 선생을 포기해야 할 텐데 그래도 좋은가?
나라 이름이 ‘대한민국’으로 정해진 과정도 임시정부 국호의 당연하고 자연스런 승계였다고 할 수는 없다. 1946년 3월 1일 행정연구위원회와 헌법분과위원회가 확정했던 전문 88조 헌법 초안은 국호를 ‘한국’으로 정했다.
“한국은 민주공화국임”이 제1조였다. 유진오 헌법 초안 제1조는 “조선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규정했다. 국회 헌법위원회의 기준안으로 채택되어 토의된 초안 제1조는 “한국은 민주공화국 이다”였다.
헌법안에 대한 국회 심의 과정(1948년 6월 23일~7월 12일)에 국호에 대한 질문(서면으로 제출됐다)이 있었다, 의원들은 첫 번째로 국호에 대해 질문했다. ‘대한민국’이라고 한 의의와 근거는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
이승만 말이라도 아닌 건 아니다
“‘대한’이라는 국호는 역사적으로 청‧일 전쟁 당시 마관(馬關: 시모노세키 옛 이름)조약에서 썼던 것이며, 그 후 한‧일 합방으로 인하여 국호마저 없어졌다. 그러나 3·1독립운동을 계기로 해외 임시정부에서 ‘대한’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으며, 이것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이상 송우 편저, 『한국헌법개정사』).
당시 헌법 초안 작성자들의 인식에서 중요시 된 것은 ‘대한’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한)제국’을 ‘(대한)민국’으로 바꾼 것은 시대의 대세를 따른 것이었을 뿐 임시정부의 간판을 옮겨온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승만 초대 국회의장은 ‘오늘 세운 민국은 29년 만에 서울에서 세운 민국의 부활’이라 했고, ‘연호는 기미년에서 기산하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정부에서 ‘관보 1호’에 이때를 ‘대한민국 30년’으로 발표했습니다”(이종찬, 대한민국 정체성 선포식 인사말).
그러므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대한민국’라고 하고 싶은 모양인데,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바로 임시정부의 정 중앙에 서 있었던 인물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독립운동 동지들의 위대한 희생정신에 대한 헌사(獻辭)는 당연히 필요했고, 이 대통령은 그런 말로 광복의 환희와 동지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표하고자 했을 것이다.
설령 그가 정말로 대한민국을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동일체로 부르고 싶었다 해도 이 명예교수의 지적처럼 개인의 정서나 신조가 역사적 사실을 바꿔 놓을 수는 없다.
1925년 4월 7일 공포된 임시의정원의 2차 개헌안을 주목할 필요도 있다. 이 헌법은 제3조에서 “대한민국은 광복운동 중에서 광복운동자가 전 인민을 대함”이라고 밝혔다. 광복이 될 때까지는 광복운동자들만의 정부로 활동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임시정부 내의 극심한 분열과, 참여자들의 이탈 등 당시의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면서 독립운동에 전념하는 정부로 나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전 국민의 정부’라는 지위를 내려놓은 것이다.
“김일성은 왕조의 창건자이며 시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을 대한민국의 창건자이며 시조라고 결단코 그렇게 모셔서 되겠습니까? 저는 절대 반대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1948년 대한민국 건국론을 반대하는 것입니다”(이종찬, 위의 글).
<김일성과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내용이 실린 잡지 (사진/뉴데일리)>
하필이면 김일성과 비교하다니
이 말에도 어폐가 있다. 김일성이 언제 우리와 논의해 가며 한반도의 북쪽에 ‘반국가단체’를 만들어 똬리 틀고 앉았던가. 김일성이 그렇게 했으니 우리는 ‘건국’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은 논리도 뭐도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유난히 북한 눈치를 살피고 그쪽 하자는 대로 따르는 인상을 주더니 이 회장의 화법도 다르지 않게 들린다.
이 회장은 취임사 논쟁에 이어 지난 3일엔 ‘대한민국 정체성 선포식’까지 하면서 임정의 역사적‧정치적 위상 높이기에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광복회 회장을 맡아 광복운동가와 그 유족들의 긍지를 되살리고자 하는 노력을 폄훼할 까닭은 전혀 없다. 광복회 안에서라면 ‘민국 105년’이라는 연호를 쓴다고 문제 삼을 일도 아니다.
광복회의 모든 구성원은 국민의 다함없는 찬사와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다만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임정에 두면서 다른 의견에 대해서는 신경질적인 반감을 드러내는 이 회장의 인식과 화법에는 문제가 있다.
대한민국은 임정의 후신이 아니라 1948년에 새로 수립된 국가(토대는 같지만 정체政體가 달라진)이다. 그 해 대한민국이 개국했다. 해방일이 아니라 국권회복일을 ‘광복절’로 부르는 게 합당하다. 김일성의 예를 우리 행위 혹은 결정의 평가 기준으로 삼는 자기 부정적 인식은 배격돼야 한다.
<김소운의 목근통신(木槿通信)>
동물들의 자격 심사회가 열렸다. 거위가 제일 먼저 나섰다. 심사위원이 공적사항을 물었다. 거위는 자신의 8대조가 트로이전쟁 때 성을 넘어오는 적병을 맨 처음 발견했노라고 했다.
“그건 자네 8대조의 이야기이고 자네의 공적이 뭐냐는 것이지.”
“예, 제가 바로 그 8대조 할아버지의 8대손이지요.”
“글쎄, 트로이전쟁은 그렇다 하고 자네의 공적을 묻지 않나.”
“참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네. 제가 바로 트로이전쟁에서 공을 세운 그 유명한 분의 8대 직손이라니까요.”
김소운이 ‘목근통신’에 인용한 이솝우화이다. 광복회 회원을 비롯 애국선열 및 그 유족들과 연결시킬 의도는 추호도 없다.
목숨을 바쳐 조국과 겨레를 지켜 주신 분들, 부조(父祖) 세대의 희생으로 모진 고통의 삶을 감당해야 했던 유족분들께 바칠 수 있는 것이라고 해야 온 마음을 다한 존경과 감사뿐임을 늘 죄송스럽게 여기는 것이 필자를 비롯한 국민 모두의 마음일 터이다.
다만 이종찬 회장의 권위의식이 넘치는 사자후를 글로 읽는 기분은 많이 거북하다. 의식하기도 전에 연상된 것이 이 우화이다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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