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25일은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이 된 6.25한국전쟁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에 남가주 교계와 엘에이 군단체들이 결성한 6.25한국전쟁 70주년 기념사업회와 함께 남가주범교민 6.25 한국전쟁 70주년 상기예배와 참전용사(한국군/ 미군)들을 위한 기념대회가 준비 중이다.
이번 행사는 6월 25일 오전 10시에 충현선교교회 (민종기 목사)에서 열릴 예정인데, 박홍기 회장(6.25한국전쟁 70주년 기념사업회 회장), 민종기 목사(충현선교교회), 한기홍 목사 (은혜한인교회), 강순영 목사 (청교도400주년 기념사업회), 한기형 목사( 세계기도모임 고문)가 공동대회장으로 15개의 남가주의 각계 사회일반단체와 엘에이 전군단체들이 연합하는 행사로 진행이 될 예정이다.
6.25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위한 감사의 선물 증정과 이번 행사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남가주에 거주하고 있는 6.25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의 노고와 수고를 역사로 남겨두게 될 6.25 한국전쟁 70주년 기념 책자를 제작한다고 한다.
기념책자는 6.25 한국전쟁 참전 용사들을 중심으로 한글과 영어로 제작하여서 ‘미 정부’ ‘남가주의 한국학교’ ‘한인 교회의 어린이 학교’ 그리고 미주 지역 전체교협에 배포를 하여서 6.25한국전쟁의 남가주 6.25한국전쟁참전용사들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둔다고 한다.
부족한 자료 문제로 이번 행사의 준비위원회에서는 가족이나 지인들 가운데 6.25 한국전쟁에 참전하셨던 분들이 있거나 정보를 갖고 있는 분들이 있으면 김영구 목사에게 알려주기를 요청한다고 한다.
<연락처310-404-6219/ e mail: [email protected]>
이에 맞추어 위드코리아 U.S.A는 금번 6.25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이하여서6.25 한국전쟁에 숨어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찾아서 함께 나누려 한다.
첫번째로 17세 소년병으로 1951년 중공군의 제1차 춘계공세 때 중공군 제9병단 예하 제20군단의 제58•제59•제60사단 등 3개 사단과 제40군단의 제120사단 등 총 4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받고
4월 22일부터 24일까지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3일 동안에 일어났던 ‘사창리 전투’에 참여하였던 “고 길운효”씨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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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문산 전투에 참가한 육군 제6보병사단 병사들
선친은 17세인 1950년 4월 우연히 병영 생활을 시작했다. 이 글은 얼떨결에 군복을 입고 훈련병 시절도 거치지 않은 채 군인이 된 선친의 전쟁 무용담 중 ‘사창리전투’ 이야기이다.
생전 아버지의 전쟁 무용담, 그리고 숙부와 사촌형들로부터 전해들은 아버지 이야기를 온전히 기억한다는 게 무리이기는 하지만, 생각나는 대로 정리해서 소속 부대의 戰史와 결부시켜 한 꼭지 씩 논픽션 형식을 빌려 써 보려 한다.
학교를 다녀 본 적 없고, 나이가 어려 징집 통보를 받아 본 적도 없는 소년이 군인이 되어 치른 전쟁 이야기인 셈이다. 그렇다. 나의 아버지는 계급장도 군번도 없이 전쟁의 참화 속으로 들어선 소년병 이었다.
⌈소년병의 사창리 패전과 표창장⌉
장도영 사단장이 지휘하는 국군 제6사단은 중공군의 춘계공세가 예고된 가운데 1951년 4월 하순으로 접어들 무렵 화천 사창리에 주둔하며 적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22일, 6사단은 전장의 긴장감으로 인한 피로를 잠시 잊고, 장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망중한의 조촐한 체육대회를 개최했다. 각 연대별로 할당 선발된 장병들을 공터로 집합케 하여 씨름과 기마전, 완전군장 단축마라톤 대회 정도가 순차적으로 진행됐다.
소년은 임부택 중령의 7연대를 대표하는 단축마라톤 선수들 가운데 한 명으로 선발됐다. 기마전은 옛 시골 동네에서의 투석전을 연상케 할 만큼 거칠었다.
병사들은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 모래와 자잘한 돌멩이들을 절반쯤 채워 감추고 있다가 기수 노릇을 하고 있는 간부들을 집중 공격했다.
적당히 힘겨루기를 하며 대치할 때쯤 계급을 내세운 상대 기수가 주먹을 휘두르면 기다렸다는 듯 양말 모래주머니를 휘둘러 그를 태우고 있는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말들이 쓰러지니 기수 노릇을 하던 간부들도 속절없이 나가떨어졌다. 비록 코피가 터지고 얼굴이 멍들고 머리에서도 피가 흘렀지만, 기마전에 참여한 장병들이나 구경하는 장병들이나 폭소를 터뜨리며 모처럼 가져 보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완전 군장에 소총을 멘 채 달리는 단축마라톤. 18세 소년은 좁은 분지를 에두른 시골길을 몇 바퀴 도는 코스를 1등으로 골인했다.
소년에게는 사단장(장도영) 표창장이 수여됐다. 그러나 표창장은 소년에게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4월 하순의 땅거미가 지고 어둑해질 무렵, 북쪽 다목리고개와 동쪽 화천천 하류 방면에서 요란한 ‘따콩’ 소리가 들려 왔다. 포탄 폭발음과 화염이 임시로 차려진 군영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사창리 분지를 감싼 능선들 에서는 꽹과리며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 6사단 전체가 사창리 비좁은 분지에 갇힌 채 중공군에게 포위된 것이다.
장도영 사단장은 미군 등에서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중공군의 춘계공세가 있을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사단 전체 병력을 사창리에 집결시켜 적이 춘천과 가평으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 하기 위한 작전을 짜고 있었다.
그런 중에 가진 체육대회와 전장에서의 조촐한 회식으로 조금은 느슨해진 장병들은 각자의 군영 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휴식을 깨는 요란한 따발총 소리와 혼을 빼는 나팔소리에 병사 들은 물론이고 지휘를 해야 할 장교들까지 군장에 개인화기까지 팽개치고 사창리 분지의 남쪽 골짜기를 향해 달음질치기 시작 했다.
▲ 인민해방군 사령관 펑더하이와 중공군 제 5차 4월공세(’51.4.22~4.30)
장도영 사단장은 다급하게 각 부대별 현 위치 사수를 명령했다. 그러나 회식과 휴식 중에 기습을 당한 장병들은 각종 화포며 개인 장비들을 팽개친 채 퇴로를 찾아 내달렸다.
장병들은 그 순간 압록강 초산까지 진격했다 온정리 계곡에서 중공군에 포위된 채 궤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며 수많은 전우를 잃어야 했던 악몽에 사로잡혔다.
(당시 초산까지 진격했던 7연대는 중공군의 포위 공격을 받아 군우리로 탈출 재집결했을 때 3,553명의 병력 가운데 75%를 잃어야 했다.
군우리로 재집결한 생존 병력 수는 불과 875명으로 연대 전투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한다.)
각종 야포와 개인화기, 군장을 비롯한 장구들까지 팽개친 채 무질서하게 남쪽 후방 가평 방면으로 내달리는 장면을 戰史와 사전류에서는 철수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퇴각이고 패주였다.
그렇게 4월 22일, 중공군 제9병단 소속 3개 사단의 기습으로 시작된 사창리전투는 19연대는 고립, 2연대와 7연대는 차량과 야포 등의 장비를 포기하고
일부는 좌우 인접 부대로, 일부는 적의 포위망을 뚫고 흩어져 철수해야 한 6사단의 완벽하고도 어이없는 패배였다.
6사단 주력이 화악산과 명지산 사이 고개와 골짜기를 따라 퇴각하며 부대를 수습, 미군 포병의 지원 하에 23일 중공군을 저지하려 했으나 이미 전투의 주도권은 중공군이 쥐고 있었다.
변변히 싸워 보지도 못하고 다시 퇴각한 끝에 24일 지금의 가평 북면에서 영연방 제27여단의 엄호 분전 덕분에 가까스로 부대를 수습할 수 있었다.
미군 헌병들이 최루 가스를 뿌리고 권총으로 위협사격을 가하며 막아섰지만, 전의를 상실한 병사들의 탈주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25일 가평읍 부근까지 내려온 6사단은 화천천을 따라 밀고 올라오는 중공군을 뚫고 화천천 하류 로 퇴각한 포병 부대원들이 춘천을 거쳐 가평 본대로 합류하면서 원형을 회복할 수 있었다.
▲ 중공군 제 5차 4월공세(’51.4.22~4.30)시 유엔군 배치 상황도와 사창리 전투에서 패배를 맞이한 6사단장 장도영 장군
당시 국군 제6사단이 사창리 패전으로 입은 무기와 장비 손실을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부득이 사단은 다시 가평 계곡을 향해 철수하여 영연방 제27여단의 엄호 하에 24일 아침 가평 남서쪽에서 부대를 재편하였다.
이때까지 사단은 소총 2,263정, 자동화기 168정, 2.36인치 로케트포 66문, 대전차포 2문, 박격포 42문, 곡사포 13문, 그리고 차량 87대의 손실을 입었다.
사단을 화력 지원한 미 포병부대도 105밀리 곡사포 15문을 비롯하여, 4.2인치 박격포 13문과 242대의 무전기, 그리고 차량 73대의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다행히 낙오한 병력들이 계속 부대로 복귀하여 4월 25일에는 6,313명이 집결하게 되었다.-
당시 수준으로 6사단이 입은 무기와 장비 손실만 해도 사단이 해체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기습과 함께 개인화기조차 챙기지 못하고 후퇴한 덕분에 국군 제6사단은 역설적이게도 병력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22일 저녁 무렵 시작된 사창리전투는 캐나다-호주-뉴질랜드 군으로 편성된 영연방 제27여단과 미 제2사단-제40사단-제213야전포병대대 부대원들의 분전에 힘입어 25일 중공군 주력이 수많은 사상자를 내거나 포로가 된 가운데 퇴각하면서 종료됐다”
소총과 군장을 챙길 틈도 없이 남쪽 계곡과 고갯길을 내달려온 소년은 23일 날이 밝아서야 미군으로부터 개인화기와 장비들을 지급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소년에게는 계급 없는 군복을 입은 지 1년여 만에 전장에서 맛본 체육대회의 즐거웠던 시간과 연기처럼 사라진 사단장 표창장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장도영 사단장 명의名義의 표창장은 학교 문턱을 넘어 본 적 없는 소년이 난생 처음 받아 보는 상이었다
♥아들 “길도형”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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