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저녁 정말 오랜만에 반가운 목소리를 들었다. 건강이 어떠실까 하는 마음에 전화를 드렸는데, 목소리는 평소처럼 또랑또랑 하셨다. “ 저예요 김 목사입니다. 잘 지내시죠?” 하였더니 “그럼요” 하시며 대답하시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가 너무 반가웠다.
“김봉건” 이분과 인연의 시작은 너무 유명하셨던 분이라 한인타운에서 종종 뵙기는 하였었는데, 직접적으로 만난 것은 2016년 11월 남가주한인목사회 회장이 된 후 첫번째 행사였던 구국기도회 때 였다.
그때 주위의 분들이 말씀하여서 만세삼창 순서를 위해 그 분을 초대하였고, 그때부터 인연이 이어진 것 같다.
그러던 차에 2017년 1월에 어느 모임이 있다고 참석하여 달라고 하는 부탁이 있어서 참석하였었는데, 그때 그분이 자리에 있었다.
초면인 분들도 있었고, 안면이 있는 분들이 있었는데, 그분들 가운데 김봉건 회장님이 계셨고, 한인타운에서 태극기 집회를 시작하려 하는데 집회 인도자가 필요한데 나한테 그 자리를 혹시 맡아 줄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을 하셨다.
나 역시 당시 한국의 사정이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던 차인지라 그렇게 하겠다는 대답을 하게 되었고, 2017년 2월 25일 첫번째 태극기 집회의 어설픈 인도자로 서게 되었고, 목회자인 나의 색다른 인생이 시작이 되었다.
그 후로 그 분을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그 분은 어느 자리에서도 곳곳한 인상과 절도 있는 말씀으로 군인의 냄새가 진하게 나시는 분이었다.
그러시던 분이 2018년 부인이 소천하시고 난 후 갑자기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평소 항상 옆에서 모든 것을 챙겨 주시던 분이 떠나가신 자리가 너무 커서 그랬는지, 기억을 놓치시고 때때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90이 넘으신 분의 자연스런 현상인지는 모르지만….
그 후로 모임에 초대를 하려 하면 댁에 가서 모시고 오고는 했는데, 모시러 간다는 날을 자주 잊으셔서 헛걸음 쳤던 적도 있었다.
항상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던 6.25전쟁때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후 북진을 하였던 국군이 평양을 탈환할 때 누구에게 평양에 먼저 입성하였다는 일념으로 말머리를 붙들고 열심히 달리셔서 제일 먼저 평양에 들어 가셨던 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기셨던 분이다.
그리고 공산당이라면 주무시다가도 벌떡 일어나신다는 그 분, 박정희 대통령을 누구보다 존경하셨고,
남가주에서 오랜 시간 동안 종북 세력들과 치열한 싸움을 하셨던 그 분이야 말로 이번 6.25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이하면서 한인타운에서 다시 기억을 하여야 마땅한 분이라 생각한다.
2018년 함께 군 복무를 하셨던 분과 함께 교회에 오셔서 사진을 건네 주고 가셨는데, 평양입성 당시의 사진이었다.
그때 말씀하신 것이 “김목사 내가 이제 정신이 없는 것 같아, 이 사진이 평양이야 누가 잘 알려주어야 할텐데” 하시는 말씀 가운데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기억하여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6.25 전쟁 70주년에 꼭 참석할께라 대답은 하셨는데, 우리가 그 분을 잊어가는 것처럼 혹시 그 날을 기억하시지 못하시면….
-김영구 목사 (남가주범교민 6.25 한국전쟁 70주년 상기예배 및 기념대회 준비위원장)-
(2013년 RFA 인터뷰 내용)
김봉건 선생은 공산주의가 싫었단다. 북쪽이 공산화가 되고 지주의 후손으로 가족이 숙청당하는 과정에서 남쪽으로 단신 탈북하게 된다.
김봉건: 저는 평안북도 큰 지주의 아들로서 태어나서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소련군이 북한을 지배하고 또 거기에 묻어서 들어온 사람이 김일성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은 김일성이 아닌 김성주 이 사람이 소련군 대위로서 들어와서 북한을 통치하게 됐습니다.
그러자 우리 지주는 모두 숙청을 당하는 과정에서 저는 부득이 고향을 떠나서 이념적으로 공산치하에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해 19살 때 단신으로 고향을 떠나서 남한에 왔습니다.
김봉건 선생은 남한에 내려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는 일을 시작하게 된다.
김봉건: 남한에서 서북청년회에 들어가서 가장 앞장서는 즉 투쟁하는 청년단원으로 활약하다가 이것은 내 길이 아니다. 나는 군인이 돼야겠다 해서 육사 7기생으로 들어간 동기가 됐습니다.
김봉건 선생이 군에 입대해 소대장으로 있을 때 회고다.
김봉건: 백천 온천에 불이 났어요. 인민군이 기습해서 백천 온천에 기름을 부어 불을 났어요.
그러다 청단에 있는 우리 병력을 백천에 옮기라 해서 백천 온천에 와 있으니 한 일주일 후에 인민군이 백천에 침입해 들어 왔습니다. 한 일개 분대 정도 침투했어요.
그래 인민군과 전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북한군이 증강해서 들어와요. 그래 할 수 없이 병력 요청을 했더니 개성 대대본부에서 1개 소대 병력이 우리한테 증원해 왔어요.
그래 전쟁이 좀 커졌습니다. 그러다 백천 온천에서 증강된 인민군 2개 소대 병력을 다 물리쳤지요. 그 덕분에 625전에 훈장을 하나 받았고 625전에 육군 중위로 특진했습니다.
김봉건 선생이 한국전쟁 중 인민군의 기마부대를 습격해 말을 탈취한 이야기 들어본다.
김봉건: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서 인민군의 허리가 끊겼지요.
모든 보급선이 끊이고 인민군이 다시 열세에 몰리는 그때에 우리는 다부동에서 우리 1사단은( 저는 그때 중대장으로서) 전쟁에 임했는데 다부동 전투 때 인민군의 기마부대가 다부동에 말이 한 30필 들어와 있었을 때에
(저는 어렸을 때부터 말을 좋아했습니다. 저희 집에 말이 있었기 때문에 말을 좋아해서) 저 말을 탈취해서 우리가 북진할 때에 써먹어야 하겠다고 생각해서 그래 야간에 기마부대를 기습해 말을 탈취했습니다.
수류탄 파편에 부상당하고 해서 쓸만한 말은 11마리의 말로 다부동 전투로부터 그 말을 가지고 북진을 할 때에 백선엽 대장께서 저희를 봤지요. 백선엽 사단장이 이 말을 가지고 우리가 빨리 미 제1 기갑사단 아주 장비가 좋지요. 이런 사단과 경쟁을 도보로서는 힘이 모자라니까?
말을 이용하자는 생각을 해서 저보다 평양에 특공대로 한 번 진격해 볼 방법을 연구하자! 해서 평양 진격을 말 11필을 가지고 진격을 하는데 평양을 목표로 해서 북진하는데.
김봉건 선생은 평양 점령은 1950년 10월 19일이었다고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단다.
김봉건: 인천상륙작전이 9월 15일 아닙니까? 9월 15일부터 우리는 다부동에서부터 떠나서 평양 점령이 10월 19일이에요.
(평양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이 시청 앞에 마련된 연단에서 기념 연설을 하자 수많은 평양 시민이 광장에 몰려들어 지켜보고 있다)
한국전 당시 김봉건 대위는 평양을 점령하고 백선엽 장군에게 보고한 이야기도 들려준다.
김봉건: 저는 말을 가지고 평양을 제일 먼저 점령한 것이 평양 비행장입니다.
평양 비행장에 새벽 4시 45분에 우리 1사단이 제일 먼저 (저는 1사단 11연대 11중대장이었었는데) 말 11필을 이끌고 평양 비행장을 점령한 것이 1950년 10월 19일 4시 45분 평양비행장을 점령하고 거기에 잔적을 소탕하는데 시간이 걸렸어요.
그래서 5시 30분에 평양 점령한 것을 사단장 백선엽 장군에게 보고한 것이 평양점령의 기록입니다.
김봉건 대위는 말 11필로 평양점령을 했다고 회고한다.
김봉건: 평양에 들어갈 적에 말에게 부담을 주면 말이 피곤하거든요. 그래서 말에 식량 보리, 콩, 겉보리 말의 식량을 말 잔등에다 포대에다 뉘어서 달아매고 그다음에 수류탄을 각자 15발씩 몸에 지니고 올라가면서 조금 위험하다는 곳에는 수류탄을 몇 발씩 던져요.
꽝꽝꽝 던지면 인민군들이 혼비백산 도망가는 거예요. 그래서 평양을 들어가는 데까지 저항을 안 받았습니다. 그래서 평양 점령 하는 데까지 아무런 저항 없이 말 11필이 그대로 들어가서 평양을 점령했습니다.
평양을 점령한 김봉건 대위는 마지막 잔군들 소탕했던 이야기다.
김봉건: 점령하고 나와보니까? 경락고 부근에서 인민군들의 사격이 들어와요. 그래 가만 보니까? 적이 어디인지가 파악이 돼요. 그래서 김 상사 너는 저쪽 호다. 이 중사 너는 우측에 호이다. 인민군들은 호에 있으니까 우리가 포복해 가는 걸 못 봐요.
그래 우리가 포복해 가서는 수류탄 한 발씩을 호 안에다 집어넣었어요. 호 안에 있던 인민군들이 백기를 드는 거예요.
소리치면서 다 나와라. 너희들 해치지 않는다. 죽이지 않겠다. 이미 우리는 평양을 점령했다. 너희들 전부 백기 들고 나와라! 그래 백기 들고 나왔어요. 그래서 거기 있는 잔군들을 소탕했지요.
김봉건 대위는 625전쟁 중에 북한의 잔악상에 대해 들려준다.
김봉건: 손들고 나오라 하니까? 백기만 흔들고 나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안 나오면 쏜다. 나오라 하니까? 저는 못 나갑니다 해요. 왜 그러냐? 하니까 인민군이 기관총에다 다리를 철사로 묶어 놨어요. 그래서 못 나오는 거예요.
그래 보니까? 철사로 묶여 있어요. 그래 내가 직접 권총으로 기관총 몸통에 쏴서 그 철사를 끊었어요. 그래서 인민군이 나왔어요. 그만큼 북한은 사람의 목숨이 중하지 않고 그런 참 무자비한 짓을 했지요.
김봉건 대위는 평양비행장에 태극기를 꼽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김봉건: 인민군들 자기들이 쓰는 국기 게양대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이 국기 게양대의 선을 자랐어 자랐지만 그걸 이어서 태극기를 올리는 데 다 올라가지 않고 반 정도 태극기가 올라갔어요.
(중공군의 압록강 도강 후 피난 하는 국군과 민간인들)
김봉건 선생은 평생을 군인으로 살고 있다.
제가 미국의 그 국토방위군 지원사령부 31사단장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국토방위군 준장에서 소장으로 진급되어서 현재 있습니다만, 국토방위군 지원사령부는 현역이 아니고 예비역으로서 임무를 하고 있습니다.
김봉건 선생은 한국군에게서의 공적을 미국에서 인정받아 미국 군대의 별을 달게 됐다고 자랑한다.
김봉건: 저는 제 이념이 공산당이 싫었고 군대 전에도 많이 싸웠고 군 입대 후에도 국가를 위해서 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전쟁에 임함으로써 전공이 많습니다.
이 저의 전공을 알린 것은 미 제 5연대에 있던 이재원이라는 친구입니다.
제 친구가 한국군에서 있었던 공적을 미국 재향군인회에 보고했고, 국토방위군 사령관이 인정해서 저를 준장으로 진급시켜서 미국에서 별을 달게 됐지요. 미국 군대의 별을 달았어요. 그래서 지금은 한 계급 진급이 돼서 소장으로 있습니다.
김봉건 선생은 전 세계 한인들에게 북한이 더이상 위협을 못 하도록 마음을 합하자고 강조한다.
김봉건: 지금 북한은 김정은이 3대 세습을 이어받으면서 김일성 김정일의 유훈을 받아서 그 유훈 정치로서 그래서 남한을 소위 핵무기를 앞세워 접수하겠다는 야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민족을 말살시킨다는 것 아닙니까? 한민족을 말살시킨다는 김정은을 우리가 그대로 둘 수 없지요. 때문에 우리는 마음과 몸을 던져서 김정은이의 핵전쟁위협을 막아 내야 합니다.
김봉건 선생은 자유대한 지키기 국민운동본부 미 서부지부를 회장을 맡고 있다. 회원 350여 명은 일치단결하여 통일에 이바지하는 것이란다.
김봉건: 저희 목표는 북한을 지원하는 친북세력을 없애고 그래서 우리의 일치단결된 힘으로 통일에 이바지하는 힘을 모으는 것이 우리 자유대한지키기 국민운동본부의 사명이 여기에 있는 겁니다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한 6·25전쟁. 전세가 몇 번 뒤집히는 치열한 전투 중인 12월4일, 동해안 지역보다 3~4도가 낮아 매서운 추위로 유명한 대동강의 한파에도 불구하고 북한 피난민들은 등에 피난 보따리 짐을 지고, 언제 무너져 내질지 모르는 차가운 철교를 부여잡고 강을 건너고 있다. 사진 뒤쪽은 대동강의 북쪽 강둑으로(당시 평양역 쪽) 차례를 기다리는 피난민 행렬이 보인다)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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