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산에서 파로호까지 2»
소년은 북한강 청평호 남안을 따라 하류로 내려갔다 댐을 건너 하천, 상천, 상색을 지나 가평읍에 다다랐다. 패주하는 중공군 뒤에는 헤아릴 수 없는 시체들이 남겨졌다.
5월 하순의 땡볕 아래 강안을 따라 적군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부패하며 부풀어 오른 배가 터질 때마다 옷섶을 비집고 내장이 쏟아져 나왔다. 살찐 쉬파리 떼가 시체와 생사람을 가리지 않고 까맣게 달라붙었다.
공병부대원들과 동원된 노무자들이 시체들을 들것에 실어 공터로 옮겼다. 공터마다 쌓인 시체더미에 기름이 부어지고 불이 붙여졌다.
소년은 소대원들과 함께 가평천 상류 방면으로 패주하는 중공군을 뒤쫓았다. 목동계곡을 지나 화악산 동쪽 기슭을 넘어 24일 지암리까지 추격전이 펼쳐졌다.
따라 잡힌 중공군들이 순순히 포로가 됐다. 민가로 숨어들었던 중공군들이 민간인들에게 끌려 나와 국군에게 인계됐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사흘을 대혼란 속에 가평읍을 통과한 중공군은 가평천을 거슬러 오르는 동안 상당수가 후퇴를 포기하고 투항했다.
용문산전투 종결을 눈앞에 둔 국군 제6사단에게는 임무 전환이 하달됐다. 지평리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 온 중공군 패잔병들과, 춘천과 평창 속사리 방면에서 후퇴해 온 중공군 3개 군단이 파로호 남쪽 간동면 오음리 일대에 집결함에 따라 신속히 퇴로를 차단하라는 지시였다.
오음리 분지에 집결한 중공군은 평균 폭 1킬로미터가 넘는 저수지를 건널 방법이 없었다. 매봉산 기슭 강안을 타고 구만리발전소 방향으로 나가 댐 아래쪽 갈수기의 북한강 여울을 건너는 게 유일한 탈출구였다.
소년은 소대원들과 매봉산 기슭을 돌아 오음리 분지를 향해 돌격해 갔다. 탈출구를 찾지 못한 중공군들이 사방에서 몰려드는 국군과 미군의 공격을 받고 저수지가로 몰려들어 일대는 큰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분지를 에워싼 산들로 탈출 방향을 잡은 중공군들이 총격을 받고 쓰러지거나 다시 저수지 방향으로 내달렸다.
미군의 항공 폭격과 포병의 맹렬한 포격을 받은 중공군은 아비규환 속에 이리저리 휩쓸렸다. 병사들은 물론 지휘관들도 국군과 미군이 보이는 대로 그 앞에 엎드리거나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무모하게 파로호로 뛰어든 수많은 중공군들이 허우적거리다 익사했다. 살아남은 중공군은 포로가 됐다.
5월 28일, 중공군 포로들이 트럭에 실리거나 도보로 남쪽으로 떠났다. 이로써 5월 18일 가평 설악면 용문산 일원에서 중공군의 5월 공세로 시작된 용문산- 화천 저수지전투가 종료됐다.
그러나 포로들이 떠난 뒤에는 또 다른 전투가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포로 숫자보다 많은, 산더미를 이룬 중공군 시신 처리였다.
7연대 병력 대부분이 시신 처리에 매달렸다. 병사들은 통나무를 이어 붙여 뗏목을 만들었다. 뗏목에 시신을 싣고 나룻배로 저수지 한가운데까지 끌고 가 수장시켰다. 시신이 떠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시신마다 묵직한 돌덩이를 달았다.
그러는 동안 5월이 가고 6월이 시작됐다. 시신 처리도 거의 끝나 가고 병사들은 여유로운 시간을 이용해 호숫가로 나왔다. 호숫가에는 신기하게도 잉어며 붕어, 쏘가리, 피라미들이 물가로 나와 주둥이를 물 밖에 내놓고 뻐끔거리고 있었다.
(1951년 춘계 공세에서 패배한 중공군 포로와 시체들)
익사하거나 수장된 중공군 시신이 부패하며 갈수기의 화천저수지가 심각한 부영양화 현상을 일으켰다. 화천저수지는 한여름에도 강심 쪽이 냉수대를 유지한다.
그럼에도 저수지는 부영양화 현상으로 인해 산소가 부족해지며 물고기들이 대량 폐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물가며 계곡 쪽으로 피신한 물고기들조차도 물 밖으로 주둥이를 내밀어 뻐끔거렸다.
소대원 몇몇이 물가로 나와 맥을 못 추는 물고기를 건져 솥을 걸고 매운탕을 끓였다. 더러는 되는 대로 모닥불을 피워 물고기를 굽는 병사들도 있었다.
소년은 고참 병사가 반합에 떠주는 매운탕을 받아들었다. 소년은 국물 한 술을 뜨려다 말고 그릇을 내려놓았다.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수장된 중공군 시체들, 가라앉다 말고 떠올라 둥둥 떠다니는 시체가 즐비한 저수지의 물고기들이었다.
소년은 헛구역질을 거듭하며 자리를 피하려 했다. 장난기 많은 고참 병사들이 억지로 소년의 입을 벌리고 민물고기 살점을 먹였다. 그러나 살점은 소년의 목으로 넘어가지 못했고, 뱃속에서 나온 토사물과 함께 땅바닥으로 뿌려졌다.
소년은 다시금 배가 아파 왔다. 입맛을 잃었고, 헛구역질이 자꾸 났다. 신경성 위염과 과민성 장염이 그 뒤로 오래도록 소년을 괴롭혔다.
국군 제6사단은 전장 정리가 마무리됨에 따라 후방으로 이동했다. 1년 동안 북한강에서 낙동강으로, 낙동강에서 압록강으로, 압록강에서 다시 한강으로 오르내리는 동안 6사단은 전쟁의 변곡점이 된 전투의 주역이었다.
춘천전투와 용문산-파로호전투가 그랬고, 동락-무극리 방어전투가 그랬다. 초산 온정리전투와 사창리전투 패전으로 부대가 해체될 위기에 처했지만, 이를 극복하고 일구어 낸 용문산-화천저수지 대승이었다.
6사단은 부대 정비를 거쳐 미군으로부터 교육과 훈련이 계획되어 있었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최전선에서 빠진 부대원들에게 잠시의 휴식이 주어졌다.
1951년 6월 6일, 중대 주둔지 막사 앞에 모처럼 이발이며 면도를 하고 누추한 군복이나마 단정하게 차려입은 중대원들이 도열했다. 앞선 전투에서의 승리로 일계급 특진을 명받았던 장병들에게 진급 계급장이 수여됐다.
1950년 4월, 우연히 군복을 입고 병영생활을 시작한 소년에게도 그 날은 매우 특별한 날이었다. 소년은 호명과 함께 중대장 앞으로 나아가 섰다. 중대장이 직접 소년의 가슴에 일병 계급장을 달았다. 그리고 소년을 힘껏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놈, 고생했다. 장하다!”
그 순간, 양평 먼 친척집 양자로 들어가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군복을 입고 생사를 넘나든 전장에서도 보이지 않았던 눈물이 소년의 두 볼을 타고 내렸다. 눈시울이 붉어진 중대장의 두 손이 소년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성명; 길운효(河, 學, 鶴 혼용)
입대일; 1951. 06. 06.
군번; 0742471
계급; 일병
소속; 7연대 3대대 12중대
1년여를 사선에서 혈전을 벌이며 살아남은 소년은 비로소 대한민국의 정식 군인이 되었다. 군번과 계급장이 주어지고, 이름과 군번이 적힌 인식표를 군복 입고 처음으로 목에 걸었다.
춘천에서 첫 전투를 치른 후, 김천 낙동강 전선에서, 삼팔선을 돌파하여 초산 압록강에서, 사창리와 용문산-화천저수지에 이르기까지 소년은 인식표조차 없이 전투를 치른 무명의 소년 용사였다.
(6.25 전쟁의 소년병들)
그리고 며칠 뒤 소년에게는 2박3일의 특별휴가가 주어졌다. 소년은 군장과 개인화기를 챙겨 군용트럭에 올랐다.
아침 일찍 양평 어디쯤에서 출발한 트럭은 초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야 인천 부평역 앞에 소년을 내려줬다. 사흘 뒤 00시까지 부평역 앞으로 와 대기하라는 지시와 함께 트럭이 떠나갔다.
소년은 경인선 철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가출한 지 네다섯 해 만에 다시 밟는 부평 땅이었다.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거칠게 씩씩거리던 증기기관차를 따라 달리며 집으로 돌아오고는 하던 그 길이었다.
철모를 쓰고 군장을 지고 소총을 멘 소년이 그 길을 걸어 집으로 가고 있었다. 철마를 따라 달리던 어린 날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소년은 총탄과 포연 속을 달리고 적군을 향해 총검을 휘두르는 순간에도, 단 한 번도 집에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부평역에서 동암 방면으로 10여 분 걸으면 곡선 구간이 나타난다. 곡선 모퉁이를 돌자 이내 철길 남쪽 나지막한 동산 아래 풍경이 익숙하다. 곡선 구간을 벗어나자 소년은 철길을 벗어나 동산 쪽으로 난 마을길로 들어섰다.
무너지고 쓰러진 집들 대신 사람들이 공터마다 판자며 막대기로 얼기설기 엮고 거적을 뒤집어씌운 임시 거처들에 머물고 있었다. 저녁 땟거리를 준비하던 한 아낙과 아낙의 치마폭을 잡고 선 코흘리 개가 소년의 귀가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소년은 동산 아래 초가지붕 끝자락이 눈에 선명해지자 “어머니!” 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소년의 군홧발 소리가 미처 집에 닿기도 전이었다.
다섯 칸 초가의 무너진 울타리 한가운데 쓰러질 듯 버티고 선 사립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달려 나오며 소리쳤다.
“둘째냐? 운학이 살아 있었느냐?”
메마른 6월 초저녁, 흙먼지 날리는 마을길을 맨발로 달려 여인이 소년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여인의 초췌하고 핏기 없는 얼굴, 야윈 몸에 걸친 남루한 치마며 저고리가 지금이 전쟁 중임을 다시금 상기시키고 있었다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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