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의 유산(遺産)을 놓고 어머니를 달리하는 두 아들, 김홍업(金弘業•전처 차용애의 소생)과 김홍걸(金弘傑•후처 이희호의 소생)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재산 싸움은, 대외적으로 감추어지기는 했지만, 그들의 아버지 때부터 아는 이들의 주목을 끌었던 재산과 권력에 집착하는 부전자전(父傳子傳)의 이 집안 내력을 보여준다.
2013년12월 일본 토쿄에서 냉전 시대 중 영국의 The Financial Times, The Time of London 그리고 미국의 The New York Times의 토쿄 특파원으로 필명(筆名)을 날렸던 헨리 스캇 스토크스(Henry Scott Stokes) 기자가 한 권의 책을 출판했다.
책의 제목은 “한 영국 기자가 본 연합군 전승(戰勝) 사관(史觀)의 허망(虛妄) – 나의 역사관은 어떻게 변천했는가?”(Fallacies in the Allied Nations’ Historical Perception as Observed by a British Journalist)였다.
이 책의 8장(내가 만났던 아시아의 지도자들)에서 저자는 그가 다룬 첫 번째 아시아 지도자로 대한민국의 전 대통령 김대중에 관하여 장문의 글을 남겨 놓고 있다. 그 제목이 “1. 자기 사익(私益)에 몰두하는 김대중”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그가 생전의 김대중과 30회 이상 단독으로 회견했을 정도로 김대중과 밀착된 언론인이었다면서, “그때는 그렇게 보지 않았지만 뒤에 생각해 보니 김대중은 오직 자신의 권력과 이익 추구만을 탐익하는 카멜레온(Chameleon)과 같은 사기꾼(imposter)이자 위선자(pretender)였었다”고 혹평하면서 “언론인으로 이 같은 사실을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럽다”는 회한(悔恨)을 적어 놓고 있다.
다음은 전 경향신문 기자로 지금은 미국 로스앤젤스에서 거주하면서 교포 방송 <라디오 코리아> 고문으로 있는 양준용 씨가 번역한 문제의 서적의 김대중에 관한 부분이다.
«사리사욕만을 탐했던 金大中»
<카메레온과 같았던 정치인 김대중>
김대중 한국 대통령은 2000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 해에 한국의 대통령 중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 남북간의 긴장 완화에 공적을 남겼다는 것이 수상 이유였다.
그런데 오늘날 남북관계가 조금이라도 개선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떻든 노벨 평화상이란 상은 이제 적당히 주고받는 상이 되어버렸다.
2009년 오바마(Barrack Obama) 미국 대통령이 이 상을 받았었다. 대단한 인기를 안고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취임 8개월반만에 이 상을 수상했다. 독일 베르린(Berlin)에서의 연설에서 핵무기 근절을 호소했다는 것이 수상 이유였다.
그렇다면 “지상에서 병마를 영구히 추방한다”고 큰 소리를 쳐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하게 한다.
2013년의 노벨 평화상은 화학무기 금지조약에 의해서 설립된 화학무기 금지기구인 OPCW(Organisation for the Prohibition of Chemical Weapons)가 수상했다. 시리아가 화학무기를 포기하겠다고 약속한 직후였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었다.
그러나 시리아의 독가스 무기의 제거작업은 다만 시작만 했을 뿐 그 작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것인가의 여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그 전 해에는 유럽 공동체(European Union)가 수상했다. 그런데 유럽 공동체 역시 경제 파탄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취재를 위해 30회 이상 단독으로 만났다. 아마도 내가 인터뷰한 아시아의 요인들 중에서 가장 횟수가 많았던 것 같다.
김대중 씨는 한국의 서남부 전라남도의 하의도 출신이다. 그는 매스컴이 자신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민감하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다.
코미디언들처럼 장면 장면마다 화장을 바꾸며, 상황에 따라 변신하는 카메레온(주위의 환경에 따라 몸의 색갈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는 파충류)과 같은 변신의 달인이었다. …
전 생애를 통해 가장 극적으로 연출한 것은 그가 한국의 현직 대통령으로 북한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일이었다. 바로 이 북한 방문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민주화 운동의 투사를 假裝한 金大中»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아직 야당 생활을 하던 70년대였다. 그는 미국과 일본에 체재하면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추진하는 한편 인권활동가로서도 활약해 주목을 끌었다.
73년 8월 김대중 씨는 동경의 구단시타(九段下) 소재 그랜드 팰리스 호텔에서 행방불명이 되었다. 한국 중앙정보부가 그를 납치한 것으로 뒤에 밝혀졌다.
일본의 한 항구를 출항한 화물선에서 그를 수장하려 했지만 바로 그 시각에 군용기가 상공에서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살해 의도는 중지되었다. [역자 주: 이 주장은 김대중 씨의 증언에 의한 것이지만 관계자들의 증언으로 이 수장(水葬) 계획은 사실무근으로 판명되었다.]
그 뒤 그는 서울의 자택에서 연금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76년에는 <민주 구국 선언>을 발표, 다시 체포되었다. 80년 2월 사면되었지만 5월에 재구금되었다. 바로 이 사건이 원인이 되어 <광주 사태>가 발발했다. 군부가 민주화 요구의 데모를 진압했고 유혈의 참사로 진행되었다.
김대중 씨는 미국에 대해 강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미군이 한국에 계속 주둔하고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김대중 씨의 저항은 과격했고 주목을 끌었다.
한국 국내에서 그만큼 강력하게 저항을 주장한 지도자는 아무도 없었다. 나의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인 김대중 씨는 민주화 운동의 투사로서의 이미지를 빈틈없이 연출했다.
70년대 후반에 이르러 박정희 대통령이 돌연 암살되었다. 박 대통령은 61년 부터 70년대까지 정권을 유지했다. 박 대통령의 암살 사건 후 권력은 곧바로 신 군부에 넘어갔고 군부가 모든 것을 장악했다.
당시의 군부는 김대중 씨를 반 군정의 중심인물로 간주, 적대시하고 제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나는 김대중 씨의 자택을 방문했다. 그는 자택 연금 상태에 놓여 있었고 군에 의해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
<뉴욕 타임스> 특파원으로 자택을 몇 차례 방문하면서 나는 김대중 씨가 <뉴욕 타임스> 지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알수 있었다. 다른 모든 언론 매체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달랐다.
김대중 씨의 자택 밖은 언제나 보도진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뉴욕 타임스> 특파원이 취재를 위해 방문한 것을 알면 곧장 집안으로 안내되었다.
그의 이 같은 특별한 배려가 미국으로 하여금 김대중 자신의 생명을 구하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감당하도록 했다. 미국의 민간 조직과 언론이 김대중의 보호세력으로 등장했다. 뉴욕 타임스는 그 선두에 서 있었다.
나는 1980년 봄에 서울을 거점으로 해서 동경을 오가며 특파원의 업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 씨가 가장 위험한 상황에 부딪쳤을 때에 직접 만나 취재 활동을 한 나는 김대중 씨를 한국의 민주화 활동의 중심인물로 치켜세웠고, 사설을 통해서도 김대중 씨는 어떤 이유에서든 쳐형되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거듭했다.
(5.18당시 광주시청의 모습)
«光州 사건을 사주한 장본인»
그러나 김대중이란 인물은 가짜(fake)인물이었다. 진짜 인물(real person)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사기꾼(imposter)이었고 위선자(pretender) 였다.
언제나 술수를 노리는 연기자였다. 사람들의 속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뒤에서 조종하는데 몰두 했다. 교활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도 그의 연기에 놀아난 한 사람이었다. 수많은 한국인들도 그에게 속아 넘어갔다. 김대중 씨의 대단한 능력은 이 같은 그의 술수가 오랜동안 발각되지 않은 채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김대중 씨가 저지른 최대의 범죄행위는 민주주의의 대의(大義)를 그의 속임수의 소재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광주 사건>이야 말로 김대중 씨의 기만행위를 그대로 들어낸 사건이었다.
1980년 5월, 김대중 씨는 신 군부의 정점에 있던 전두환 세력에 의해 체포되었다. 광주에서 소란 사태가 발생하자 김대중 씨는 그 배경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김대중 씨가 탐한 것은 권력이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했다. <광주 사태>가 발생한 시기에 그가 가장 마음을 쏟은 것은 자신이었고 이 <광주 사태>를 이용해서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는 일이었다.
광주 사건으로 부터 20주년을 맞은 2000년에 <광주 봉기>(kwangju Uprising)란 책이 뉴욕의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이 책은 내가 편집한 책인데 당시의 사건 취재에 임했던 10명의 유럽 및 미국의 기자와 10명의 한국인 기자가 집필했다.
이 책의 출간으로 사건 당시에 쓸수 없었던 사실들이 햇볓을 볼 수 있었다. 공동 집필자들은 모두 기꺼히 옛일을 되새기는 데 동참했다.
<광주 봉기>의 참모습은 <김대중 폭동>이었다. 광주 사건은 김대중 씨 자신이 민주화의 기수라는 가면을 쓰고 폭동을 사주해서 대통령이 되고자 했던 폭동이었다.
우리 저널리스트들도 그의 연출에 영락없이 속은 꼴이었다. 우리들은 꼭두각시(puppet)에 불과했다.
나의 처는 전업주부이지만 예리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에 그녀는 김대중 씨가 깔아 놓은 연극에 놀아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나에게 계속 주의를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광주 봉기>는 그 발단부터 김대중 씨가 깔아 놓은 연극이었다.
광주는 김대중 씨의 근거지였고 이곳 주민들은 군사정권의 압정에 시달려 왔다.
김대중 때문에 압정에 시달린 것은 아니지만 이 점이야말로 그의 집권 전략에 꼭 들어맞는 환경이었다. <광주 사태>는 김대중 씨가 의도해 온 그대로였다.
나는 <광주 봉기>가 출판되었을 당시까지도 김대중 씨의 역할이 그렇게 큰 것으로 상상할 수 없었다. 김대중은 봉기가 폭발했을 당시에 투옥된 상태에 있었고 그 이후의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씨의 생명을 구한 것은 그 뒤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로날드 레이건(Ronald Reagan)의 측근 관계자들이었다.
1980년 가을, 군을 장악한 전두환 한국 대통령과 레이건 대통령의 측근들 사이에 한 밀약이 맺어졌다.
레이건 신 대통령을 만나는 최초의 외국 원수로 전두환 대통령이 되도록 워싱턴행 초대장을 받는 것과 수감 중인 김대중을 처형하지 않는다는 것을 서로 교환키로 한 약속이 밀약의 내용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이 사형수 김대중을 처형하지 못하도록 노력한 것은 미국의 일반인들이 당시의 김대중 씨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기수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에서의 광란 사태가 김대중 파의 리더들에 의해 일어났고 광주가 점거되었을 때에 서방측 미디어가 한결같이 김대중을 한국의 민주화를 추구한 ‘착한 사람’ (good guys)로 치켜세웠었다. 물론 당시의 군부는 ‘나쁜 사람’(bad guys)으로 그려졌다.
이 같은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의 단순한 2분법은 수년간 지속되었다. 아마 아직까지도 이 2분법이 여전히 살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도 미국에서는 김대중이 한국의 민주화를 꽃피운 영웅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을 흔히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김대중은 ‘착한 사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나는 지금도 후회막급일 뿐이다. 광주에서 300명 이상이 학살당했다. 시민뿐만 아니라 군인도 살해되었다.
그 책임은 김대중이 오직 혼자 져야 할 일이었다. <광주 사태>를 일으킨 사람들, 김대중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김대중이 얼마나 세속적인 지위와 돈에 집착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일족의 축재를 위해 돈줄 만드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는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 서방측 져널리스트들에게는 이런 사실들이 철저하게 숨겨졌었다.
(헨리 스캇 스토크스(Henry Scott Stokes)
«저널리스트로서의 과오를 부끄러워 할 뿐»
그런데 그의 죄상은 개인 축재보다 훨씬 더 무거운 국가반역죄에 해당되는 매국행위에 있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북한과의 관계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김대중씨는 뼛속 깊은 곳까지 부패해 있었다. 한국의 서민들 사이에서 그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본명은 김대중이 아니라 돈(금)을 너무 많이 사랑한다는 뜻의 ‘금대호(金大好)’로 불리어야 한다는 죠크가 나돌기까지 했었다.
한국은 어디까지나 중국 문화권에 속해있는 나라이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을 포함해서 역대의 중국과 조선의 권력자들은 횡령이나 착복에 깊숙하게 빠져들어 있었다. 김대중 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민주화의 기수라는 간판 외에 노벨 평화상이란 명예를 얻고자 그의 부하들을 동분서주케 했다. 그는 물욕과 명예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사리사욕의 화신 그 자체였다.
내가 1968년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에 한국은 아직 가난한 국가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현재의 한국을 만든 기초를 구축했다.
박정희 장군은 일본 국내에서 훈련을 받고 만주국(滿洲國)의 군 장교가 되었었다. 그는 20년 만에 한국을 현대국가로 변신시키는 데 성공했다. 만약 그가 이때 암살되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업적을 쌓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6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 한국은 끊임없이 위험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실제로 나도 암살 대상자의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특파원 입장에서 한국의 정계와 군 관계에 관한 공개되기를 꺼렸던 많은 것들을 보도해 왔기 때문이다.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나를 총이나 칼로 해치는 것이 아니라 사고를 가장한 상황을 조성해서 죽이려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마이크 맨스필드(Mike Mansfield) 주일 미국대사는 내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보디가드의 역할을 담당할 대사관 경호원들을 동행토록 하겠다고 제의하기도 했다. 그 제의를 나는 거절했지만 암살 위협은 <광주 사태> 이후 상당 기간 계속되었다.
오늘날 이런 위험은 이미 사라졌다. 서방측 져널리스트의 생명이 총구의 표적이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당시의 한국에는 독기(toxic air)가 충만해 있었다.
나의 주변 인사 중의 한 사람은 오래전부터 “김대중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다. 북조선의 포켓 속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북한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지 한국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해 왔다. 나는 “그런 바보 같은 소리가 어디 있어.
그는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 온 정치지도자이다. 크리스쳔이며 선량한 사람이다”라고 반론을 제기해 왔다.
하지만 김대중에 대한 나의 당시의 진단은 과녁 밖으로 한참 빗나가 버렸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어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그는 자신이 북한의 괴뢰임을 스스로 드러내었다.
나는 져널리스트로서 자신의 불민했음을 부끄럽게 여길 수밖에 없다. 정말 부끄럽고 죄송하다는 생각이다.”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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