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0월 폐허화된 남대문 주변 시가지의 모습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나는 여섯 살 어린이였다. 하지만 그때 보고 느낀 몇가지 단편적인 기억들은 상당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생생하다. 오히려 어린 마음에 각인된 이미지는 영영 지워지지 않을 것같다.
첫 기억은 우리가 살던 집은 서울 종로구 연지동의 한옥이었는데 하루는 주위가 뭔가 뒤숭숭했다. 평상시와 다른 느낌인데 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소란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크게 외치는 음성이 들리더니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가사 끝에 “김일성 장군 만세” 하는 큰 소리 뒤에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한참동안 들려왔다. 연속적으로 그 노래가 들려와서 나도 모르게 그 가사를 대충 따라할 수 있을 정도였다.
며칠 후에 우리집 대문 앞에 서서 골목의 옆집을 쳐다보니 웬 남자가 그집 주인 남자를 집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데 양손이 뒤로 묶인채로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었고 그 낯선 사내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져 있었다.
♦1950년 영등포역의 피난민들
놀란 나의 어린 가슴은 콩닥콩닥 뛰고 나는 얼른 대문을 닫고 집안으로 쏙 들어와버렸다. 그때 그 두사람의 장면을 나는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가 종종 왜 집안의 장작더미 뒤에 갑자기 숨는지 알 것같았다. 아버지가 잡혀가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나는 늘 조마조마했다.
그후 얼마가 지났는지 몇달인지 해가 바뀌었는지 어린 생각에 잘 모르겠는데 하루는 큰 소리가 울리며 귀청이 떠나가도록 엄청난 포성이 들려왔다. 하루 종일 밤새도록 쉴 새없이 들려왔다.
놀란 가슴은 말로 다할 수 없고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결에 잠을 깨어 누운채로 천장을 바라보니 구멍이 뻥 뚫려 하늘이 보이는데 내 옆에 못보던 쇠붙이 파편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덮고자던 이불에 구멍을 낸 것도 있었다. 어린 나는 겁도 없이 신기해 하면서 주먹만한 파편을 들어보니 우둘둘툴한게 꽤 무거웠다. 그래도 작은 것들도 있어 나는 그것들을 가지고 장난감 삼아 놀았다.
안방에서 나와 마루방에 나가보니 석가래 기둥이 부숴지고 거기도 파편이 나뒹글고 있었다.
그집에 나의 할머니는 다른 방에 부모님은 나와 같은 안방에서 주무셨는데 네 식구가 다 무사했던 것은 정말 기적이었다.
♦1950년 9월28일 서울 수복 당시 폐허가 된 남대문 모습
얼마후인지 하루는 트럭이 집앞에 왔다. 그걸 타고 부산으로 내려간다고 했다.
짐을 챙겨 우리 식구는 트럭에 올랐다. 트럭 뒷곁에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빽빽히 타고 있었는데 모두가 아버지의 친구들 집안 식구들이었다.
나는 탈 자리가 없어 트럭 운전사가 위치한 바로 지붕 위 바깥에 아버지와 함께 올랐다. 자리가 그것밖에 없어 겨우 그나마 자리를 잡았다.
어찌 보면 가다가 자칫하면 지붕에서 굴러떨어질 형편인데도 어린 나는 좋아라고 아버지 무릎에 앉아 며칠을 그곳에서 지내면서 경주에까지 내려갔다.
트럭 운전사석 지붕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람들이 보통이를 손에 들거나 등에 메거나 머리에 이고 걸어서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행색이 고달프고 몹씨 힘들어보였다.
어린 나는 천진난만하게 그들을 신기한 눈으로 계속 바라보았다. 내또래 어린아이들이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바삐 걸어가는 것을 물끄럼히 쳐다보기만 했다.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는 서울의 피난민들
저녁 해질 무렵에 어느 여관에 도착하여 우리 일행은 모두 각방으로 배치되어 하루를 쉬게 되었다. 우리들은 그새 몸이 추워서 덜덜 떨면서 왔기에 집집마다 여관 마당에 있는 장작더미를 자기 방 밑의 아궁이에 넣고 불을 땠다.
한참을 몸을 덥히고 있다가 보니 아랫목이 너무 뜨거워 나는 윗목으로 올라갔다. 얼마후에 보니 다들 윗목으로 올라왔는데 아랫목은 노란 장판이 약간 검게 그을러 색갈이 변해있었다. 다들 너무 추운 김에 장작을 너무 많이들 때어 각방마다 다 그렇다고 했다.
경주에서의 첫밤 경험이었다. 이튿날 일어나서 보니 바로 옆에 불국사가 있었고 근처에 석굴암이 있다고 했다.
그 여관의 이름은 기억에 없지만 지금도 그 여관의 외관과 장작더미가 잔뜩 쌓여있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만약에 경주에 간다면 그 여관을 찾아보고 싶다. 이젠 다 없어졌을테지만.
♦1950년 부산 영도
드디어 부산에 도착해서 사람들마다 중간에 내려 흩어졌다. 우리는 초량동의 수원지가 있는 산기슭에 있는 가옥에 세를 들어 주인집과 함께 옆방에서 곁방살이를 살게 되었다.
집안에서 저 아래 멀리 부산 앞바다가 내려다 보였고 작은 배와 큰배들이 많이 떠있는데 하역을 하는 기중기가 오르락 내리락하는 걸 나는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다. 또 저 먼 수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그 멀리에는 돛단배들이 떠있었다. 오른쪽 끝에는 부산의 영도 다리가 큰배가 지나갈 때는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들어올렸다. 그때마다 동네 아이들이 “영도다리 꺼떡꺼떡” 하면서 웃었다.
하루는 동네 친구들과 근처에 나가보니 언덕에 대공 고사포 진지가 있었다. 신기하게 구경하고 있으려니 미군 병사 한사람이 다가와 웃으면서 초콜렛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는 내가 처음으로 본 미국사람이었다. 그가 뭐라고 얘기했지만 우리는 멍하니 그저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그는 우리에게 보란듯이 고사포를 이리저리 돌리며 방향을 빙글빙글 회전시키면서 장난끼 섞인 표정으로 우리를 힐끗 쳐다 보았다.
친구들과 함께 정신없이 구경하면서 나는 저 재미난 사람이 사는 미국이란 나라는 어떤 곳일까 잠시 생각이 스쳤지만 곧 잊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도 그 미국인 병사가 그때 고사포를 하늘을 향해 조준하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 것같은 생각이 든다.
-박영남 목사-
광복회 미국서남부지회 회장/ 남가주한국학교 초기교장 역임
새소망장로교회 협동목사/ LAUSD 교육국 성인교육부 자문 역임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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