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키 높은 한 그루의 큰 나무가 있다. 이 큰 나무도 처음에는 조그만 씨앗이었다. 처음에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씨앗이었는데 점차 성장하다가 마침내 큰 나무가 된 것이다.
작은 씨앗은 이미 커다란 나무의 가능성을 속에 품고 있었다. 다만 씨앗은 ‘아직 큰 나무가 아닌’(not yet) 상태였고, 다 큰 나무는 ‘이미 벌써 큰 나무가 되어 있는’ (always already) 상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씨앗을 가능태(可能態, 디나미스 dynamis)라고 했고, 성장한 큰 나무를 현실태(現實態, 에네르게이아, energeia)라고 했다.
영어로 가능태는 potentiality 혹은 possibility이고, 현실태는 actuality이다. 모든 존재의 생성(生成, becoming)이 가능태와 현실태의 과정으로 설명된다.
사물들은 항상 가능적인 상태로부터 현실적인 상태로 진행해 가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가능했던 것이 실현되어 현실적 존재로 되어 가는 것이 곧 생성이다.
씨앗이 수목으로 되고, 가수를 지망하던 어린 연습생은 수많은 팬을 몰고 다니는 아이돌 그룹의 인기 가수가 된다.
‘아직-아닌’에서 ‘언제나-이미’로의 도약에서 헤겔은 현실성이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내가 정말 하려고만 했으면 나도 재벌이 될 수 있었지” 이런 말을 헤겔은 공허한 가능성 혹은 약한 자의 부질없는 변명이라고 말한다. 가능성의 진정한 본성은 그것의 현실화를 통해서만 확증된다는 것이다.
당신이 어떤 것을 정말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유일하게 유효한 증명은 단지 그것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헤겔도 가능성이 현실성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이 있다는 것을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보여주었다.
가능성을 현실성의 부족 또는 결함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가능성 그 자체는 가능성이 스스로를 현실화하는 순간 사라지지만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 어떤 현실적인 효과들을 발휘하는 엄청난 힘이다. 어찌 보면 현실성 보다 더 큰 힘이다.
노인보다 젊은이가 더 아름답고 우월하게 보이는 이유는 젊음이 가진 그 가능성 때문이다. 앳된 신인 가수가 노련한 기성 가수보다 더 각광을 받는 이유는 신인 가수가 가진 앞으로의 오랜 시간동안의 가능성 때문이다.
라캉의 정신 분석에서 상징적 거세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한데, 여기서도 우리는 현실성에 대한 가능성의 우위를 확인할 수 있다. 거세불안이란, 여자가 자기에게 음경이 없음을 지각할 때, 그리고 또 남자가 “그것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될 때 느끼는 심리적 불안감이다.
그런데 거세 불안은 단순히 ‘거세’라는 그 사실보다 오히려 거세의 ‘가능성’ 때문에 생기는 불안감이다. 현실성보다 가능성의 힘이 더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즉 거세의 가능성이, 우리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의 낙인을 찍으면서 우리의 심리를 실제로 거세하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만연한 건강 불안증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건강을 잃는다’는 그 사실보다 ‘잃을 수도 있다’는 그 가능성 앞에서 더 큰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고 있다.
가능성과 현실성의 이와 같은 단락(短絡, short-circuit) 현상이 가장 현저하게 드러나는 것이 권력의 장이다. 권력은 잠재적 위협이라는 형태로만 즉 그것이 완전한 일격을 가하지 않고 스스로를 유보하는 한에서만 가장 효과적으로 발휘되는 힘이다.
가부장 시대의 아버지의 권위를 한 번 생각해 보자. 아버지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해 소리를 지르고, 아이를 때리는 등 완전한 권력을 휘두르는 순간, 그것을 바라보는 가족들은 아버지에게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폭력을 무능한 가장의 무분별한 격노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상징적 권위란 언제나 잠재적 가능성일 때 가장 유효한 현실성을 획득한다. 잠재적 위협이 실질적 힘의 전개보다 훨씬 더 무섭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인정투쟁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주인은 노예의 노예가 되고, 노예는 주인의 주인이 된다는 이 변증법은 주인이 노예가 될 가능성 그리고 노예가 주인이 될 가능성 때문에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한다.
노예가 최종적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그 순수 가능성만으로 이미 노예는 충분한 힘을 갖게 된다.
공산주의 혁명 초기 단계에서 노동자 계급은 그들이 주인의 주인이 될 것이라는 가능성 때문에 이미 벌써 주인들을 제압하고 타도했던 것이다.
벤담의 판옵티콘 원리도 바로 이것이다. 비록 내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누군가가 나를 지켜볼 수 있다는 사실이 원형 감옥 독방에 갇힌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중앙 감시탑 안에서, 자기 몸은 드러내지 않은 채, 몰래 나를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이 있다는 것을 자각할 때 나의 불안감은 극대화된다.
내가 어느 순간에 감시당하고 어느 순간에 감시당하고 있지 않는지 알 수 없다는 이 근본적 불확실성이야말로 내가 현실적으로 감시당하고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큰 공포감을 야기한다.
사실 이것은 감시가 현실로 실현된 것도 아니고 단지 가능성에 머물러 있을 뿐인데도 그러하다. 아니 가능성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더 무서운 것이다.
대통령이건, 단체장이건, 중견 간부건, 권력을 가진 사람을 편의상 주인(master)이라고 해보자. 이 주인은 언제나 근본적으로 사기꾼이다. 그는 결코 완전하게 그 자리에 부합하는 능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인의 능력은 엄밀히 말해 언제나 환유적(換喩的)이다. 환유란 부분으로 전체를 지시하는 비유법이다.
그가 주인인 것은 그가 가진 쥐꼬리만한 능력이 그가 차지한 자리의 한 귀퉁이와 부분적으로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주인이란 비어 있는 자리를 불법으로 차지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현실적으로는 그에게 막강한 힘이 있다. 바로 권력의 잠재적 성격 때문이다. 권력의 행사를 계속 지연(deferral)시키고, 유보(keeping-in-reserve)시킬 때 그의 권력은 강철처럼 견고하고 지속성을 갖게 된다.
계속 지연되고 유보된다는 것은 권력이 가능성으로 남아 있을 뿐 실현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미 실현된 후에는 폭력 쓰는 아버지처럼 초라하게 되지만,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의 권력은 실제 이상의 엄청난 힘을 갖는다.
권력의 속성에 대한 기계적인 해석일 수도 있지만, 또 한편 권력은 겸손해야 한다는, 일견 구태의연한 도덕률일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 마구 폭력을 행사하는 무도한 권력의 행태를 무력하게 바라보고 있다. 아무리 잘못 해도 처벌받지 않고, 아무리 법을 어겨도 법에 걸리지 않으며, 아무리 천박해도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아무리 국민을 무시해도 지지율이 올라가는 이상한 권력이다.
그러나 권력은, 있으되 행사하지 않을 때 더 무서운 것이다. 지연되고 유보되었을 때 막강한 힘이 있는 것이지, 손쉽게 휘두르는 권력은 이미 권위의 임계점을 벗어나 불쌍한 아버지처럼 초라해 보일 뿐이다.
비록 지금은 그들의 에너지가 넘쳐나는 듯해도 사물의 생성 원리를 거스르는 힘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현 시점에서 그나마 우리를 위로하는 안도감이다.
박정자(도서출판 기파랑 대표)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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