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7월, 리투아니아의 일본 영사관 문 밖에 모여든 200명의 유대인은 문안에 있는 남성이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르는 최선의 방법을 제공해 주리라고 생각했다.
그 남성의 이름은 ‘스기하라 지우네(杉原千畝)’로, 표면상으로는 유대인을 구조하는데 나설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외교관인 스기하라는 16년간 헌신적이고 충실하게 다양한 직책을 수행한 공로로 일본 총영사가 된 인물이었다. 적합한 자격도 외교단 내에서 그의 진급을 용이하게 했는데 그는 국가공무원이자 사무라이 가문의 아들이었다.
그는 직업적인 목표를 높게 설정하고, 언젠가는 모스크바의 일본 대사가 되기 위해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정도로 공부했다.
스기하라는 자신보다 더 알려진 오스카 쉰들러(‘쉰들러의 리스트’로 유명한)처럼 게임과 음악과 파티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표면적으로는 이른 아침에 숙면을 깨우는 낯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그가 안락하고 즐거운 인생을 보장하는 외교관직을 걸고 자신의 경력과 명성과 미래를 위험에 빠뜨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가족에게 어떤 결과를 미칠지 잘 알았음에도 그 일을 했다.
<리투아니아 시가지 동쪽 언덕 주택가에는 스기하라가 근무했던 2차 세계대전 당시 카우나스 일본 공사관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후 한 대학의 아시아연구소로 쓰이던 공관은 스기하라를 기리는 리투아니아, 벨기에 학자와 기업인이 세운 ‘생명의 외교관-스기하라재단’이 건물 일부를 사들여 ‘스기하라의 집’으로 꾸미고 당시 집무실과 기념물을 전시하고 있다. 사진 = 일본 문예연구가 カジポン 제공>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대인들과 이야기를 나눈 스기하라는 그들의 곤경을 이해했으며, 여행 비자를 발급하기 위한 승인을 요청하려고 도쿄로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유대인에 대한 일본의 관대한 비자와 정착 정책들이 여전히 유효하기는 해도, 외무성에 있던 스기하라의 상관은 그런 정책들을 지속시키면 히틀러와 일본의 외교 관계를 저해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결국 스기하라의 요청은 거부됐고, 긴급하게 다시 올린 두 번째와 세 번째 청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나이 마흔 되기까지 어떤 불성실이나 불복종도 보인 적이 없었던, 성격은 관대해도 직업적으로 야심 찬 경력을 쌓아온 그가 자기 인생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분명하게 전달된 두 번의 명령을 완전히 거부한 채 유대인에게 필요한 비자 서류들을 작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결정은 스기하라의 경력을 산산조각 냈다. 그는 한 달 만에 총영사직에서 해임되어 더 이상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없는, 리투아니아 외곽의 아주 낮은 직위로 강등됐다. 그러다가 결국 불복종을 이유로 외무성에서 퇴출당했다. 전쟁 후에는 불명예 속에서 생계를 위해 전구를 팔았다.
<스기하라 지우네가 자필로 발급한 비자, 매겨진 번호로만 확인 된 발행 수가 2139개이며 당시 비자 하나로 일가족의 통행이 가능했음에 6,000여 명의 유대인 난민이 그가 발행한 비자로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스기하라는 리투아니아 영사관이 문을 닫기 직전 몇 주 동안 자신이 한 결정을 충실히 지키면서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신청자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탈출에 필요한 문서 작업을 완성했다.
심지어 영사관이 폐쇄되어 호텔에 머무르면서도 그는 비자 발급을 계속했다. 그 임무의 중압감 때문에 여위고 탈진한 후에도, 그와 같은 중압감으로 인해 그의 아내 역시 어린 자녀를 돌볼 수 없게 된 후에도 스기하라는 서류 작성을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신청자들에게서 그를 떼어놓기 위한 열차가 플랫폼에 도착했을 때도, 그 열차에 오른 뒤에도 그는 비자를 발급해서 생명을 보장하는 그 문서들을, 생명을 움켜쥐고 싶어 하는 손들에게 넘겨줬다.
그 과정에서 그는 무고한 유대인 수천 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실은 열차가 출발하는 순간, 스기하라는 남겨두고 떠나야만 하는 이들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조력자로서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용서를 구하면서 말이다.
<카우나스 역에 있는 스기하라 영사 기념동판>
♦스기하라로 하여금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이런 선택을 하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
수천 명의 유대인이 일본으로 탈출하도록 돕기로 한 스기하라의 결정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 아니다. 이런 종류의 특별한 자비심에는 일반적으로 다양한 힘이 영향을 미치고 상호작용을 한다. 하지만 스기하라의 경우는 ‘집을 기반으로 하는’ 요인이 두드러진다.
세무 공무원이었던 스기하라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시절) 얼마간 한국으로 파견되어 가족과 함께 이주해 여관을 열었다.
스기하라의 부모는 다양한 손님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숙박비를 지불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음식을 비롯해 목욕과 세탁까지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도움을 주었는데 스기하라는 그러한 부모의 모습에서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고 기억했다.
우리는 이로부터 스기하라가 수천 명의 유대인을 도우려고 노력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건 집에서 다양한 개인에게 노출됐던 경험을 통해 그의 가족에 대한 개념이 확장된 덕분이었다. 사건 후 45년이 지난 후, 스기하라는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유대인의 국적과 종교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단지 그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인류라는 가족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이었으며, 그들이 자기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다고 말이다.
그의 이야기에는 자녀가 넓은 자비로움을 가지기를 희망하는 부모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바로 집 안에서 아이들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도록 하고 그 사람들을 가족처럼 대해주는 것이다.
<유대인 생존자와 스기하라의 아들>
*본문 출처: 로버트 치알디니의 <초전 설득>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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