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상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던 맥아더 장군과 월미도의 상륙작전 상황도>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이 넘게 이어진 한국전쟁을 통틀어 일거에 전세(戰勢)를 역전시킨 작전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인천상륙작전을 언급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한국전쟁의 대전환점이었던 인천상륙작전과 수도 서울을 탈환한 작전은 별개의 작전이 아니라 일련의 연속된 작전으로, 미국 해병대와 함께 주공 임무를 수행하였던 한국 해병대는 경인지구 작전 (1950.9.15 ~ 10.8)으로 명명하고 한국 해병대 7대 작전에 포함하고 있다.
가을의 초입인 9월, 현 대한민국이 어떤 과정과 희생을 통하여 현재의 우리가 자유와 풍요로운 민주주의를 향유하고 있는지 간략히 알아보자.
인천상륙작전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은 제 2차 세계대전간 해군의 니미츠(Chester William Nimitz) 제독과 더불어 태평양 전역 수행 의 양대 거목이었으며, 태평양의 섬들에 배치된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해 적의 약한 곳으로 상륙하여 병참선을 차단함으로써 최소한의 아군 피해로 적을 격퇴하는 상륙작전을 미 해군과 함께 50여 회나 수행한 상륙전의 베테랑이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개전초기 항공기 전선 시찰을 통하여 북한군 후방으로 상륙, 적을 포위 격멸하려는 블루하트(Blue heart)계획을 구상하고 부대를 준비시켰으나, 북한군의 예상보다 신속한 남진으로 취소하게 되었다.
이후 이 계획을 발전시켜 작전계획 100- B(인천), 100-C(군산), 100-D(주문진)의 3개안 중 100-B(인천)이 채택되어 9월 15일을 상륙돌격 D일로 예정한 크로마이트(Chromite) 계획이 수립 되었다.
이는 바다를 기동공간으로 사용한 기동전으로서 적의 후방 깊숙한 곳으로 상륙하여 후방 병참선 차단, 낙동강 전선의 적부대에게 양면전투, 포위로 인한 전선 와해는 물론
아군의 피아간 심리적 중심인 서울을 조기 탈환하고, 인천항만 및 김포공항을 확보함으로써 북진을 위한 기동 및 작전지속지원이 가능하게 하는 탁월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인천의 조수간만의 차이, 좁은 수로, 낙동강 전선에서 지나치게 이격되어 상륙군 부대의 각개격파 위험성 등의 여러 이유로 미 합참과 해군, 해병대는 물론, 육군에서조차 반대 의견을 피력하였고, 대안으로 군산일대를 상륙지점으로 제시하였다.
<9월 8일 상륙작전 투입을 위해 군함 탑승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미 육군참모총장과 해군참모총장을 포함한 합동참모본부의 반대 논리를 침착하게 청취한 맥아더 장군은
“적은 후방을 무시하고 있고 병참선이 과도 하게 신장되어 있으므로 서울에서 신속히 이를 차단할 수 있으며, 낙동강 전선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소모전보다 10만여명의 인명피해를 줄이고 단기간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다.
전략적, 심리적, 정치 적 이유를 들어 중요한 수도 서울을 단시일 내에 탈 환하기 위해서는 인천에 상륙해야 한다”
“인천항의 지리적 난점은 해군이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믿으며, 나는 해군보다도 더 해군을 신뢰한다” 라는 연설로 미 국방부 및 합참, 각군 대표단을 설득하여, 마침내 미 대통령도 이 계획을 승인하게 되었다.
작전보안 및 적 기만을 위하여 동서해안에 함포사격 및 공중폭격, 군산에는 상륙양동, 장사에는 상륙양공 규모의 기만작전이 수행되었으며,
인천의 해안두보를 기준으로 해안두보 외곽은 공군기가 병참선 차단 폭격을, 해안두보 내부는 미 해군 및 해병대 공격기가 적 예상 포진지, 및 참호에 대한 폭격을 실시함으로써 상륙군의 상륙돌격 을 위한 여건 조성작전을 실시하였다.
<7만5000명이 261척의 함선으로 감행한 인천상륙작전의 유엔군 편성도와 2단계작전간 월미도에 상륙하는 해병대 모습>
상륙군은 미 제10군단을 창설하여 그 예하에 최초돌격 제대로 미 해병대 1사단, 한 해병대(미측 편 의상 한 해병대 1연대로 명명)
그리고 후속 양륙부대로 미 육군 7사단, 한 육군 17연대를 편성하였고, 해군을 포함한 총상륙부대 규모는 8개국 261척의 함선과 75,000명의 병력이 인천 앞바다의 상륙해 역에 집결하였다.
미 해군정보장교 클라크 중위와 한 해군 정보부 대원 등 첩보부대가 팔미도에 사전 침투하여 정보수집 및 팔미도 등대를 밝혀 상륙기동부대를 유도하였다.
상륙작전의 지상작전개념은 2단계로 계획되었으며, 1단계는 해안에 상륙돌격후 적의 포병으로 부터 후송 상륙의 안전을 보장하는 해안두보(육상의 교두보 개념)를 확보하고,
2단계는 내륙 지상작전을 실시하여 인천일대를 완전히 확보하여 서울방향으로 계속 공격하기 위한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다. 인천해안 상륙을 위한 상륙해안은 3개소를 선정하였으며,
적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감제고지인 월미도를 녹색해안, 그 좌측 해안을 적색해안, 이격 된 우측 해안을 청색해안으로 선정하였다. 9월 15일 새벽 06:30분, 가장 위험한 목표인 월미도(녹색해 안)에 미 해병대 1개 대대가 최초 상륙돌격을 개시하여 목표를 점령한 후,
오후 만조까지 방어를 실시하고, 다음 만조시간인 오후 17:30분에 월미도 좌측 적색해안에 상륙 돌격하는 미 해병대 연대(-) 및 한 해병대 1연대를 화력으로 엄호하였다. 이어서 수 km우측에 이격된 청색해안에 미 해병대 1개연대가 상륙 돌격하여 각각 부여된 목표를 공격하여 확보하였다.
상륙돌격은 상륙작전에서 가장 위험한 단계로서 해군은 이를 결정적 작전이라 칭하며, 해병대는 상륙돌격이라 부른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일에 인천항에 상륙한 우리 해병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There is no place to retreat, thus every Marine Should be rough mentally. 후퇴할 땅이 없다, 고로 모든 해병대원은 정신적으로 강해야 한다’ 은폐 엄폐할 곳이 없는 상태에서 해상에서 해변으로 돌격하여 적을 격퇴하고 상륙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상륙군의 특성을 잘 표현한 미 해병대의 문장이다.
맥아더 장군은 기함에서 해병대가 상륙돌격에 성공한 후 내륙으로 진격 중이라는 보고를 받고나서 “해군과 해병대가 오늘과 같이 빛난 적은 없었다” 라며 감격스러워하였다.
이후 미 해병대 1사단의 예하 3대 연대는 각각 김포공항 확보, 서울 수복을 위해 공격기세를 유지하여 계속 공격을 하였고,
한 해병대는 북한군 인천잔당을 소탕하는 한편, 미 해병대 1사단장 명의로 임시 인천시장을 임명하여 인천의 시정 회복 및 치안의 신 속한 회복을 위한 민사작전을 펼쳤다.
그리고 미 육군 7사단과 한 육군 17연대는 9월 18일 행 정적 상륙을 통하여 인천으로 양륙된 후 수월비행장 확보 및 미 8군부대와 연결, 이후 서울 수복작전을 위해 투입된다.
인천상륙작전은 대우회 기동으로서 맥아더 장군의 적시적 계획과 실행으로 비교적 적은 손실로 전세를 역전시켰으며, 성공요인은 미 해군의 해상지원 자산이 충분하고 미 해병대의 탁월한 상륙전 능력, 이후 한·미 해병대 및 육군의 유기적인 합동 및 협동작전에 기인한 것이었다.
반면, 중국의 등소평이 유엔군 상륙작전에 대한 장소, 시기 등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김일성에게 전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전략적 실책을 범하였는데 인천에 대한 방어를 증강하지 않았음은 물론,
서울지구의 주력부대들도 낙동강 전선 투입을 위해 이동시키는 크나큰 우를 범하였다. 이에 대 한 자격지심인지 북한은 인천상륙작전을 대대적으로 승리한 작전으로 전사를 날조하여 북한주민에게 교육하고 있다(귀순자 증언)
본인은 30여년의 현역 복무간 정보/작전, 인도/파키스탄 분쟁지역, 이라크 파병, 주한미군 해병대 무관 등 한미연합작전, 한미동맹 업무, 국제분쟁지 역에 근무할 기회가 있었다.
전장에서의 위험, 부상당한 현지민의 아픔 공감, 한미동맹의 현장 근무를 통하여 깨달은 것은 워싱턴 D.C. 한국전 추모공원에 새겨진 문구처럼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라는 점이다.
모든 것에는 그것에 합당한 ‘희생’ 이 따르며, 위험에도 불구하고 헌신하기 위해서는 합당한 ‘가치’ 를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 속에 우뚝 솟은 대한민국(경제력 10위, 군사력 6위)은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작전, 그리고 한국전쟁과 그 이후 정전기간 동안 발생한 수많은 군인(작전간 아군 피해 참조)과 우리 국민들의 값진 희생위에 우리 국민 모두가 하나가 되어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또한 공고한 한미동맹의 바탕 위에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안정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적정한 국방재원으로 한국의 안전을 보장한 가운데 경제발전을 비롯하여 각분야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과 미합중국은 그간 ‘한미상호 방위조약’을 바탕으로 한 군사동맹체였으나, ‘자유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가치동맹으로 발전하고 있는 바,
대한민국의 국제적 지위에 부합하는 한 미 공동의 가치와 국제적 위상에 걸 맞는 동맹체로서 지속적인 안보와 경제적 풍요를 향유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한미동맹을 위해 헌신하시는 한미우호협회와 그 회원분들에게 감사드리며, 72년전 9월의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작전에서 몸과 마음을 바치신 참전 용사분들께 가슴 깊이 존경의 마음을 표한다.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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