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선생과 김일성 주석이 1948년 4월 22일 남북연석회의장으로 함께 걸어가고 있다/통일부 제공>
‘김구는 통일 지상주의자가 맞는가?’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38선을 넘어 북으로 향했다. 유엔 감시 아래 치뤄질 5.10 단독 선거를 불과 한 달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이었다.
김구는 평양에서 닷새 동안 회담을 하고 김일성과 함께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유엔이 결정한 남한 단독선거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지금도 몇몇 역사학자들과 정치인들은 김구의 38선 돌파와 김일성과의 회담을 남북 통일을 위한 순수한 민족주의적 행동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문재인 정부 당시 통일부 장관을 역임했던 이인영 장관의 ‘김구 국부론’과 같은 것이다.
그는 2020년 7월 통일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에서 대한민국 건국과 관련 이승만 초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묻는 질문에 답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국부라는 주장에는 솔직히 동의하기 어렵다. 우리의 국부는 김구가 됐어야 했다는 역사 인식을 갖고 있다.”
실제로 이인영 장관은 1987년 9월 ‘동지여 전진! 동지여 투쟁!’이라는 제목의 문건을 통해서 이승만 정권을 ‘괴뢰정권’이라 칭하며, 미국의 대리통치자로 육성된 정권이라 목소리를 높인 적이 있었다. 87년 전대협 1기 의장으로 활동하던 시기 발언이었다.
‘김구가 국부가 됐어야 했다’는 이인영과 같은 사람들의 생각은 사실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로 자주 등장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1948년 김구의 북한행이다.
당시 김구는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으로 유명한 비상선언을 발표한 뒤 북으로 향했다.
마치 민족의 통일을 위해 끝까지 애국심에 불탔던 순수한 정치인의 모습으로 미화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정말 그는 순수했을까? 사실은 달랐다.
대중들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이라는 문구에만 집중하지 정작 김구가 김일성과 평양에서 어떤 합의를 했는지에 대해선 관심조차 없다. 공교롭게도 이런 무관심이 ‘이승만’을 죽이고 있다.
당시 김일성, 김구의 공동성명은 크게 네 가지다. 미소군대 즉시 철수, 내란 방지, 전조선정치회의를 통한 통일임시정부 수립, 그리고 남북한 총선거. 언뜻 보면 우리 민족 스스로의 독립과 통일의 의지가 반영된 이념을 초월한 순수한 선언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세 번째 3항의 세부 시행 세칙이었다. 김일성과 김구는 전조선정치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평양 연석회의에 참가한 59개 정당과 단체들로 한정한다고 합의했다. 쉽게 말해서 남한의 우익 진영, 이승만과 한민당 등은 단 하나도 포함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진정 통일을 염원했다면 조건 없는 전 민족적 구성원의 참여를 보장하는 게 옳다. 그래야 통일주의자로서의 김구의 명분도 설 수 있다.
그러나 김구는 평양 연석회의에 참가하지 않은 남한의 정당과 사회 단체를 전면 배제한 채, 통일정부를 위한 회의체를 구성한다고 합의헸다.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남한 세력만으로 통일을 추진한다는 것이 진정 통일 위한 올바른 길이었을까?
이미 1946년 2월부터 북한은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 공산주의 이념에 기초한 국가의 기능들을 운영하고 있는 중이었다.
인민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토지개혁’이 이뤄졌고, 산업시설의 국유화가 이뤄졌다. 특히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으로 진행된 토지개혁 같은 경우에도 진정 통일을 염두에 둔다면 쉽게 결정될 수 없는 중대한 민족적 사안이었다.
진정 남과 북의 원만한 통일을 원한다면 일방적인 38선 이북에서의 토지개혁 같은 사업은 절대로 진행되지 말아야 할 사안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북한은 이미 남한을 배제한 단독정부가 추진되었고, 48년 김구의 평양 방문은 일종의 자신들이 추진하는 공산정권을 정당화시켜주는 들러리밖에 안 되는 꼴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1948년 4월 김구가 평양으로 향하던 시점, 북한에서는 매일 수천 명의 북한 주민들이 남한으로 남하하고 있었다. 북한은 자신들이 천국 같은 나라를 만들었다고 떠들었지만, 실제로 북한 주민들은 천국(?)을 버리고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미군정청장 윌리엄 딘 장관은 김구의 평양행과 남북협상이 본격화되던 시기 다음과 같은 의미 심장한 발언을 남겼다.
“만일 남조선으로부터 하루에 몇천 명이라도 북으로 가준다면 남한에 있는 사람들의 식량배급도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반대로 무슨 까닭인지 그들이 천국이라고 부르는 북한을 버리고 남한으로 오고 있다.”
김구의 어리석음을 냉소적으로 비판하는 이승만의 발언 역시 의미 심장하다.
“소련 정책을 아는 사람은 시간 연장으로 공산화하자는 계획으로 간파하고 있는데 한국 지도자 중에는 홀로 이것을 모르고 요인 회담을 진행한다면 몽매하다는 조소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소련 해체 이후 나온 비밀 문건들에는 당시 평양으로 김구를 초청한 것이 소련군정이었다는 것이 밝혀져 있다. 한마디로 이승만과 김구를 갈라놓겠다는 의도였던 것이다.
이것이 객관적 사실에 기초한 김구와 김일성의 평양회담의 실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김구의 평양 방문을 순수한 민족애의 발로 높이 평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남한의 ‘김구 신화’는 이렇게 사실을 무시한 채 대중들에게 실상을 감추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던 것이다.
지난 70년의 역사는 거짓이 참을 이긴 선전과 선동의 역사였다. 객관적 사실에만 충실해도 건국의 역사, 건국 대통령의 가치는 빛을 발할 것으로 믿는다.
글쓴이: 김덕영/리버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및 Docustory production에서 근무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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