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하치장(荷置場)을 방불케 하는 사이비(似而非) ‘박람강기(博覽强記)’를 무기 삼아 정신 나간 자의 망발(妄發)을 남발(濫發)하는 김용옥(金容沃)의 사설(邪說)을 새삼 시비할 가치를 느끼지 않는다.
최근 이승만(李承晩) 건국 대통령에 대한 김용옥의 망언(妄言)에 분노하는 분들을 위하여 2007년10월10일 <조갑제닷컴>에 수록했던 필자의 졸고(拙稿) 한 꼭지를 재록(再錄)한다. 강호제현(江湖諸賢)의 편달을 바란다. (李東馥 謹書)
‘도올’은 ‘돌(石)’이다 — 김용옥의 狂言과 暴說
<조갑제닷컴> 2007.10.10
1972년10월 평양에서 <남북적십자회담> 세 번째 본회담이 열렸다. 남쪽에서 7명의 대표, 7명의 자문위원을 포함한 59명의 대표단이 4박5일의 일정으로 평양을 다녀왔다. 이 무렵 남북관계의 상황은 지금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남북간의 긴장은 최고조를 유지하고 있었고 국내적으로는 <국가보안법>과 <중앙정보부>뿐 아니라 <반공법>마저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평양 회담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북한지역을 오가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혹시라도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이 도끼가 되어 발등을 찍는 사고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냐는 불안감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이 평양에 머무는 동안 드디어 ‘사고’가 터졌다. 이 회담 기간 중 남쪽 대표단 일행은 북한측의 ‘안내’와 ‘질서’에 따르게 되어 있었다. 북한측이 마련한 남쪽 대표단 일행들을 위한 ‘안내 일정’에는 <조선혁명박물관> 참관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혁명박물관>은 총건평 53,700㎡에 90여개의 전시실과 3개의 영화실을 갖추고 있었으며 건물 앞에는 김일성(金日成)의 거대한 동상(銅像)이 평양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북한측은 이날 남측 대표단 일행에게 30여개의 전시실을 보여주었다. 전시물은 김일성의 만주(滿洲)에서의 항일 빨치산 시절의 유물이라는 무기류와 피복류 약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붓으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린 것들이었고 김일성이 등장하는 극히 제한된 매수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이 사진들은 김일성의 존재가 부각되도록 심하게 조작(造作)∙개작(改作)ㆍ변조(變造)되어 있어서 하와이 대학의 서대숙(徐大肅) 교수처럼 동일한 사진의 원전(原典)을 다수 확보하고 있는 수집가들이 이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원전과 전시된 사진 사이의 차이를 놓고 안내원과의 사이에 심한 실랑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박물관 참관 다음 날인 1972년10월26일 <로동신문>ㆍ<로동청년>ㆍ<민주조선> 등 북한 신문들이 모두 2면 전면을 할애하여 남측 적십자회담 대표단 일행의 <조선혁명박물관> 참관 기사를 실었다. 그런데, 문제는 기사의 내용이었다. “민족의 영예를 빛낸 가장 영광스러운 역사…. 북남 적십자 단체들의 본회담 제3차 회의에 참가한 남조선측 성원들과 함께 <조선혁명박물관>을 참관하고”(<로동신문>),
“김일성 수령님의 력사는 주체의 력사이며 애국, 애족, 애민의 력사입니다”(<로동청년>), “위대한 수령님을 모신 민족의 크나큰 긍지”(<민주조선>) 등의 제목 아래 페이지를 가득 메운 르포타지 기사들의 몇몇 문제 대목들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았다.
“강사의 해설을 정중히 듣고 난 한 남조선측 성원은 우리에게 ‘김일성 장군님의 투쟁사는 민족의 긍지를 높여 줍니다. 그 분은 참으로 위대한 수령님이십니다’라고 말하였다.” “남조선측 성원들은 ‘김일성 수상님의 사상은 옳았습니다. 그 분의 통일전선 전술이 옳았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수상님의 민족단합을 위한 넓으신 도량과 아량 있는 포용력에 깊은 감동을 표시했다.”
“참관을 마치고 나서도 한 남조선측 성원은 ‘김일성 수상님의 력사는 해방 전이나 후나 다 빛납니다. 그 분의 력사는 주체의 력사이며 애국, 애족, 애민의 력사입니다’라고 감격해 마지않았다.”
이 신문들을 받아 본 남측 대표단의 분위기는 아연 심각해 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남측 대표단의 이범석(李範錫) 수석대표(외무장관으로 전두환ㆍ全斗煥 대통령을 수행하여 미얀마 방문 도중 1983년10월9일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북한이 저지른 폭탄 테러로 사망)는 급하게 북측의 김태희(金泰熙) 단장을 찾았다. 이범석은 그를 찾아 온 김태희에게 북한 신문들을 보여주며 기사 날조행위에 대해 엄중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김태희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한 마디로 “무슨 소리냐?”는 것이었다. 김태희의 반응은 북측 신문들의 기사 내용이 “전혀 잘못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왜냐 하면 문제의 기사들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기초하여 작성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이에 대한 김태희의 대답은 “언론의 사명은 인민을 정치적ㆍ사상적으로 올바르게 교양하는 데 있기 때문에 있는 사실이라고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인민을 올바르게 교양하기 위하여 필요한 내용으로 기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 북한 신문들이 보도한 남한 적십자회담 대표단 일행의 ‘조선혁명박물관’ 참관 기사는 “정당하다”는 것이었다. 김태희는 다음과 같은 항의로 그의 말문을 닫았다. “더구나 문제의 기사들은 북조선의 인민들을 보라는 것이지 남조선 인민들더러 보라는 것이 아닌데 어째서 남측에서 이 기사를 가지고 시비하느냐”는 것이었다.
이것이 북한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실체다. 이제는 김용옥에게 물어야 하겠다. 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는 김용옥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그래도 김용옥은 평양 <만수대 창작사>의 ‘공훈화가’들의 그림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원칙을 버렸다”고 비난하겠다는 것인가?
사실은,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북한 예술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사실주의)이 건재하고 있는 예술”이라고 극찬을 마지않았다는 문정인의 말이 옳은 말이었다는 것을 그가 아직도 깨닫지 못 한다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김용옥은 ‘도올’이 아니라 한 조각의 ‘돌(石)’, 그 가운데서도 잡석(雜石)에 불과한 존재일 뿐이다.
‘도올’ 김용옥의 유려(流麗)한 문재(文才)와 분방(奔放)한 언변(言辯)은 장안의 화제가 된 지 오래다. 그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을 섭렵(涉獵)하는 박람강기(博覽强記)로 세인(世人)을 놀라게 해 온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외피(外皮)일 뿐 그의 내면(內面)은 대ㆍ소변(大ㆍ小便)을 가리지 못 하는 천치(天痴) 이외의 다른 아무 것이 아닌 것 같다.
그 결과 그의 ‘말’과 ‘글’은 광언(狂言)ㆍ폭설(暴說)일 뿐이다. 다른 것은 제켜 놓자. 어떻게 북한 땅에 펼쳐지고 있는 수령독재라는 이름의 전근대적(前近代的)인 봉건왕조(封建王朝) 체제를 옹호할 수 있는 것인가. [끝]
이동복(李東馥, 1937년 출생)
1973년 남북조절위원회 남측 부대표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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