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6.25 참전유공자회 서울 금천구지회 회원들이충북 충주시 탄금대 ‘팔천고혼 위령탑’을 찾아 한국전쟁 국군포로 송환을 북한에 촉구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제공
70년전의 6.25 한국전쟁은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남겨 놓았다.
그 가운데 우리들이 잊지 말고 반드시 기억하고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일이 북으로 납북이 된 납북 가족과 전쟁 중에 포로가 되어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국군 포로의 이야기다.
포로로 북에 감금되어 있다 탈북에 성공한 국군 포로의 자녀들의 간증을 들으면 그들은 대부분 함경도의 아오지 탄광 등에서 노역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다행이 가정을 이룬 분들의 자녀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숙명적으로 깊고 어두운 탄광이 그들이 삶의 터전이 되고, 그 후손도, 또 다른 세대 역시 반복되는 노역과 감시로 점철되는 삶의 연속이라고 한다.
현재 엘에이에 정착하고 살고 있는 탈북자 중에도 세명의 국군 포로의 자녀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불순 성분자로 낙인이 찍혀서 15세가 되면 아버지를 따라서 아오지 탄광속으로 들어가서 삶을 영위하였다고 한다.
현재 한국의 정부는 납북가족과 국군 포로와 그들의 유해 송환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를 않고 있다. 이에 우리들이라도 잊혀져 가는 그들을 잊어서는 안되고, 언젠가는 그들의 유해라도 돌려 받아 고향 땅에 묻힐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2007년 조선일보에 기사화가 되었던 몇 분의 탈북 한 국군포로 자녀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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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낳지나 말 것이지』
이만동씨 딸 옥화씨
지난 2월28일 충북 청주의 한 빌라에서 국군포로 이만동(1931년生, 1996년 사망)씨의 딸들을 만났다. 첫째 李玉女(이옥녀·49), 둘째 李玉分(이옥분·46), 셋째 李玉熙(이옥희·42), 넷째 李玉春(이옥춘), 다섯째 李玉花(이옥화·36)씨이다. 막내 아들 李光明(이광명·33)씨는 중국에서 실종됐다.
다섯 딸들은 중국을 떠돌며 그동안 갖은 고생을 다 했다. 자식들은 하나같이 국군포로 출신인 아버지를 원망했다고 한다. 다섯째 딸 玉花씨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아부지에 대한 좋은 추억이 없어요. 항상 「이렇게 멸시받으면서 사는데, 도대체 우리를 왜 낳았냐. 낳지나 말 것이지 왜 이렇게 고생을 시키냐」고 울면서 따졌어요. 저는 심지어 때리기도 했어요.
그러면 아부지는 「너희들이 몰라서 그래. 내가 北에서는 이래도 남한만 가면 영웅대접 받을 거다」며 우리와 함께 고향으로 가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얼마나 죄송한지…』
이만동씨는 19세 때 1950년 육군에 입대해 참전했다. 1952년 강원도 금화전투에서 포로가 됐다. 북한은 그를 아오지탄광으로 보냈고, 탄광일을 하다 몸이 나빠져 결핵에 걸리기도 했다.
육군에서는 1952년 7월28일 이만동씨를 戰死者 처리했다.
아오지탄광이 국군포로들로 넘쳐나자, 북한은 이만동씨를 포함한 많은 국군포로들을 하면탄광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그는 고아 출신 홍경숙씨를 만나 1957년 결혼했다. 이만동씨의 나이 만 26세, 홍경숙씨의 나이 16세였다. 玉花씨가 어머니에게 들은 얘기를 전했다.
『어머니가 부모님이 없어 거지같이 지냈대요. 그걸 본 큰외삼촌이 동생을 결혼시켜 제대로 살게 해야겠다 싶어, 국군포로 출신 세 명을 데려와서 고르라고 했대요. 어머니는 국군포로인 줄도 모르고, 셋 중 아부지가 가장 마음에 들어 결혼했대요』
이만동씨는 발령을 자주 받았다. 아오지탄광에서 하면탄광으로 옮긴 이후에도, 은덕으로 무산으로 부령으로 옮겨 다녔다. 그 사이 1남5녀가 태어났다. 발령이 떨어지면 홍경숙씨는 만삭인 배를 부여잡고 이동해야 했다. 둘째 玉分씨의 설명이다.
『녹야리로 온 이후로 아부지가 「림업(임업)설계」를 했어요. 말이 좋아 림업설계지, 집에서 100리도 더 떨어진 산중에서 사람 한 명, 등불 하나 없는 곳에서 산림을 지키는 일이에요. 집에는 한 달에 한 번 내려오는 정도였어요. 우리 어머니는 생과부나 마찬가지였죠』
계속해서 아버지에 대한 회상을 했다.
『항상 조그마한 라디오를 끼고 다니셨어요. 일하실 때도 그렇고 한 달에 한 번 집에 올 때도 항상 지니고 다니시며, 밤 늦게까지 몰래 들으셨어요.
어쩌다 집에 오실 때면, 새벽에 남들 몰래 얘기했어요. 당신이 서울에서 식당 일을 했었는데, 나비넥타이를 이렇게 매고 일했다며 흉내를 내보였어요. 한번은 呂運亨(여운형) 선생 댁에도 배달 간 적이 있다고 했어요. 항상 고향 얘기, 남쪽 얘기뿐이었죠』
아버지는 항상 「생활총화록」을 가지고 다니며, 일주일에 한 번씩 검사를 받으러 당에 갔다고 한다. 玉花씨가 자기 얘기를 들려주었다.
『북한에서 학교 다닐 때, 신상옥 감독이 만든 영화 「사랑 사랑 내 사랑」을 좋아해서 열 번을 봤어요. 「춘향전」을 북한에서 제작한 거죠. 그런데 친구들 두 명과 영화를 보다가 선생님한테 잡혔어요.
셋이 잡혔는데 다른 둘은 아무 이상이 없었어요. 저만 아부지가 잡혀 가 「자식교육 똑바로 못 시키나? 」 하매, 「자아비판서」를 쓰고 곤욕을 치렀죠. 참나, 내가 영화 본 거랑 아부지가 교육시키는 거랑 무슨 상관이라고』
♦탈북자가 공개한 북한 덕천역 앞 쓰레기 더미에서 수거해온 음식 꺼내먹는 북한 아이들
「꽃제비」가 된 국군포로 이만동
1953년 4월26일 체결된 포로교환협정에 따라 문산 「자유의 마을」에 도착하고 있는 국군포로들. 그러나 많은 국군포로들이 북한에 강제억류되어 차별 속에 한평생을 살았다.
―국군포로 가족으로서 본인이 받았던 차별은 없었나요.
『왜 없어요, 항상 받지. 北에서는 학교 갈 때 「金日成 장군 노래」를 불러요. 그럴 때면 선생은 우리가 노래를 부르나 안 부르나만 보고 있어요.
수업 시간에는 애들 앞에서 우리를 「남조선 괴뢰도당의 자식들」이라며 손가락질을 해요. 우리 막내 동생이 고생을 참 많이 했는데… 아이고, 불쌍한 것』
― 중국에서 행방불명됐다던 그 남동생 말씀이시죠.
『네, 1992년에 우리 남동생은 군대를 「삽자루 부대」로 갔어요. 건설현장에서 막일을 하는 곳이죠.
국군포로 가족이니까 제대로 된 군대를 못 가고 그런 곳으로 간 거죠. 거기서 어찌나 맞았는지 「뇌타박(뇌좌상의 북한말)」이 심해서 「감정제대(의가사제대의 북한말)」했어요.
머리가 엉망진창이 돼가지고 와선, 그 후로 어려운 일을 못 하고 거지같이 빌어먹고 다녔어요. 그때가 1996년 2월입니다』
그 당시 북한은 기근이 가장 심할 때였다. 玉花씨를 제외하고 모두 출가한 상태였다. 아버지는 1992년에 은퇴를 한 후, 출가한 자식들 집을 돌아다니며 얻어먹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꽃제비(노숙자)」라고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玉分씨가 회상했다.
『이웃 사람이 찾아와선, 「玉分씨 고향이 부령 아니래요?」 라고 물어요. 「왜 그러느냐」니까 빨리 와보래요. 「사람이 기차역에서 절벽으로 굴러 떨어졌는데, 죽었다. 주민등록증을 보니까 아무래도 玉分씨 아버지 같더라」 그래요.
가보니까 아버지가 맞아요. 그날도 딸 집에 먹을 걸 구하러 왔다가 변을 당하신 거예요. 정말 끔찍했어요. 양팔이 다 꺾여서 뼈가 양쪽으로 튀어 나와 있어요. 온몸이 피투성이고 바지에 대변을 싸 놓은 게, 벌써 半시체더라고요.
넷째 玉春이랑 들쳐 업고 와 간호해서는 사흘 만에 눈을 뜨셨어요. 돌아가실 때까지 팔에 뼈가 튀어나온 채 계셨어요』
‹쥐약을 탄 음식을 먹고 死亡›
“이만동씨 딸 옥춘씨”
玉分씨는 그날 일이 생각이 나는 듯 몸서리를 쳤다.
『그 이후, 아버지께 넷째 玉春이 집으로 가시라고 했어요. 거기가 평안북도 동림군의 농장이었는데, 아무래도 농장이면 먹을 게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딸들은 아버지가 먹을 걸 구하러 찾아오는 것이 반갑지 않았다고 했다. 우선 내가 굶어 죽고 자식들을 굶겨 죽일 판국인데, 아버지까지 생각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玉春씨 가족의 사정도 좋지 않았다. 거기다 다섯째 玉花씨와 막내 남동생까지 거지행세를 하고 합세했다. 배급은 3인분인데 식솔은 3명이 더 붙은 것이다.
아버지는 그 집에서 하반신 마비가 왔다. 워낙 못 먹은 상태에서 방안에만 앉아 있은 탓이었다. 주로 집에 누워 있고, 가끔 기어서 나오는 정도였다. 玉春씨의 말이다.
『나도 곤란하게 됐단 말이지. 집에 애는 두 명이지. 식량은 다 떨어져서, 농장에서 구걸하는 것도 한두 번이에요. 베개 속에 넣었던 벼 껍질까지 다 먹고 풀뿌리도 죄다 캐먹었어요.
나는 조그만 우리 애들 굶겨 죽일 생각하니까 가슴이 아픈 거야. 아부지한테 말했죠. 「우리 이렇게 드러누워 있지 말고 살 궁리를 하러 가자」고. 그랬더니
아부지가 「내 너한테 면목 없다. 부모가 자식한테 이렇게 얹혀 사는데, 내 미안하다. 나는 살 만큼 다 살았으니까 너거는 나 생각하지 말라. 그냥 떠나라」 그러더라고요.
야, 기가 막혀, 하늘도 무심하지, 어떻게 자식이 부모를 버릴 수 있냐고요(玉春씨는 흐느꼈다). 아부지가 굶어 죽을텐데 그냥 간다는 게 너무 가슴 아프제. 아부지 생각만 하면 내가 지금도 이렇게 가슴 아프디.
아부지한테 「일주일 안에 내 꼭 돌아오겠으니까, 아부지 그때까지 꼭 살아 달라, 살아만 있어 달라」 하고 갔어요』
옥수수를 훔쳐 먹으며 연명하다 보니 석 달이 지났다. 아버지 상태가 안 좋다는 편지가 왔다. 그 길로 달려갔지만,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뜬 후였다. 玉春씨가 전했다.
『동네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돌보던 아줌마가 하루에 한 끼씩 멕이면서, 빨리 죽으라고 구박했대요. 아부지는 먹을 게 없으니 아침부터 동네 오물찌꺼기를 뒤져 가며 먹으매, 얼굴이 이마이 부었대요.
죽기 전날 저녁에 아부지 먹는 데 약을 넣었대요. 그래서 돌아가신 거라고 동네에 소문이 파다해요. 그 말을 듣는데 너무 가슴 아픈 거예요. 내가 우리 아부지한테 죄를 진 거예요. 자식이 부모를 그렇게… 』
그녀는 오열했다. 또 한 명의 국군포로가 낯선 땅에서 비인간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1996년 6월28일이었다.
♦2014년 10월10일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통일동산주차장에서 탈북자 단체인 자유북한운동연합 회원들이 대북전단 풍선을 날리고 있다
2003년 2월 玉春씨는 중국으로 탈출했고, 베트남·캄보디아를 통해 2003년 6월27일 자유의 땅으로 왔다. 한국으로 탈출한 玉春씨와 다섯째 玉花씨는 정부에서 받은 정착비를 들여 언니들을 데려왔다.
첫째와 셋째 언니가 2004년 3월에 들어왔고, 마지막으로 2004년 7월 둘째 언니가 딸(이안나·3)과 다섯째 玉花씨의 아들(이광·7), 잃어버린 줄 알았던 玉春씨의 큰아들(최철범·16)을 고아원에서부터 데려왔다. 8년 만의 재회였다.
자매들은 2004년 텔레비전에서 「李蓮順씨가 국군포로 아버지 유해를 모셔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매들이 모여 의논을 했다.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의 恨이라도 풀어 주자는 의미였다.
살아생전 잘하지 못했던 미안함이 컸다. 자매들은 한국 정부에 지원을 요구하지 않고 직접 나섰다.
2005년 4월13일 넷째 玉春씨와 다섯째 玉花씨가 중국으로 떠났고, 유해를 인계받아 4월20일 돌아왔다
kim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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