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재 교육문화평론가
(더 자유일보) 제공
(사진 출처 : 키워드로 보는 북한 핵 – 티스토리01 영변원자로) Yongbyun 5MWe Reactor(캡쳐)
∥북핵에 대한 좌파의 논리 또는 전술은 부정→ 연막작전→ 양면작전→ 역습의 네 단계로 바뀌었다. 마지막 단계가 바로 탈원전이다.∥
◇프랑스 상업위성 SPOT2의 쾌거
1989년 9월 15일, 서방 세계의 여론 바다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프랑스의 상업위성 SPOT(Système Probatoire d’Observation de la Terre 지상관측을 확증하는 시스템)이 영변의 원자로가 핵무기용임을 위성사진으로 낱낱이 보여 준 것이다.
당시 북한은 영변에 원자로 외에 핵재처리 시설도 가동하여 핵무기용 플루토늄을 생산하고 있었고, 신포에는 소련의 지원으로 1992년부터 3기의 원자력발전소(총 1950MW)를 건설하려고 기술자들이 대거 파견되어 한창 기초 작업 중이었다.
SPOT는 발전용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송배전 시설이 전혀 없다는 것과, 영변의 원자로가 영국과 프랑스가 1950년대에 핵무기를 생산하던 원자로와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을 생생히 보여 주었다.
게다가 5MW 원자로 근처에 핵재처리 시설에 필수적인 두꺼운 방사능 차폐벽(遮蔽壁)을 설치하고 그 위에 흙을 덮고 나무를 심는 저간의 과정까지 보여 주었다.
미국은 군사위성으로 이미 1982년부터 진행과정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군사비밀로 간직하고 한국 정부에도 알리지 않았다.
미국은 대신 영변 원자로를 건설해 주고 있던 소련을 압박해 북한이 1985년 핵확산금지조약(NPT Non-Proliferation Treaty)에 가입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소련이 권고해도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의 안전조치협정에 서명도 않고 사찰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출처 사진 : 키워드로 보는 북한 핵 – 티스토리SPOT-2는 해상도가 높은 위성사진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프랑스 주도로 스웨덴과 벨기에가 협력해 만든 상업용 인공위성이다) (캡쳐)
◇북한이 NPT에 가입하고 IAEA 사찰을 받아들인 배경
그러다가 1991년 남북비핵화선언에 서명한 후에야, 북방정책의 천려일실로 미군의 전술 핵무기가 철거된 후에야, 소련에서 러시아로 바뀐 후에야, 러시아가 신포에 원자로를 못 지어 주겠다고 협박하자, 북한은 1992년 IAEA의 안전협정에도 서명하고 IAEA의 사찰도 받아들였다.
이때까지 한국의 좌파는 한사코 영변의 원자로는 소월의 진달래꽃처럼 아름다운 원전이라고 강변했다. 미국이 아니라 프랑스가 물증을 제시하여 다 들켰지만, 국내에서는 좌우 가릴 것 없이 그런 소식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때라서 그 논리는 그런 대로 통했다.
김일성이 그 수십 년 전부터 밤낮 한반도 비핵화를 주장하고 1980년대에는 주사파도 맹렬히 그것을 복창하자, 선한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면 선한 행동으로 답할 줄 알고, 노태우 정부는 제 꾀에 속아 미군의 전술핵무기를 철거하게 만들었다.
민족주의의 열기에 더하여 자유민주와 시장경제의 우월성에 자신감이 봇물처럼 넘쳐서 이름(泰愚)답게 진짜 큰 바보짓을 한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국은 산업화와 정보화, 민주화를 아무리 자랑해 봤자, 북핵에 대해 속수무책! 급기야 북핵은 미국과 북한의 문제라는 유럽의 어느 평화로운 나라 시민처럼 자포자기(自暴自棄)하기에 이른 것이다
출처 : 더 자유일보(http://www.jayoo.co.kr)
kim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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