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너무나 그 의미가 견고하여 마치 태초부터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많은 용어들이 사실은 모두 어느 특정 시기, 특정 사람들에 의해 명명된 것이다.
명명이라는 말도 정확한 표현은 아닐지 모른다. 명명이란 실체가 먼저 있고, 다음에 거기에 이름을 붙인다는 의미인데, 어떤 집단이나 현상의 명칭은 그 순서가 뒤바뀌어 이름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실체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계급의 개념이 그러하고 민족(nation)도 마찬가지다.
근세 이전까지 민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설혹 단일한 땅 위에 사는, 비교적 단일한 언어와 풍습, 그리고 단일한 법을 가진 다수의 개체로 이루어진 집단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민족이 아니었다.
관습과 언어의 같음과 다름이 혼재하면서 희미한 국경선을 서로 넘나들던 아득한 중세의 사람들이 나중에 누군가 민족이라는 말을 만들어내자 헤쳐 모이기의 바쁜 동작 속에서 그 중 가장 비슷한 사람들끼리 한 데 모여 집단을 형성했다.
하나의 용어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그 용어가 지칭하는 실체도 그것을 만든 사람의 의도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만일 같은 용어를 여러 사람이 각기 다르게 정의했다면 그 중에서 역사적으로 확고하게 살아남는 정의가 결국 헤게모니를 장악할 것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가 1817년에 그린 시에예스의 초상〉
오늘날 민족의 정의는 대체로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정치가인 시예스(Sieyès)의 것이다.
그에 의하면 우선 하나의 민족이 존재하기 위해서 반드시 왕이 있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정부가 있을 필요도 없다.
정부가 구성되기 전에, 군주가 생기기 전에, 권력의 대표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민족은 존재한다. 다만 하나의 민족이 있기 위해서는 우선 명시적인 법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제정하는 기관이 있어야 한다.
즉 법과 입법기관의 존재는 민족이 성립되기 위한 필수적이며 형식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그것이 민족을 정의하는 유일한 조건은 아니다.
하나의 민족이 존속하고, 그들의 법률이 적용되고, 그들의 입법기관이 인정받고, 그들이 역사 안에서 실제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조건들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직업’과 ‘직책’이다. 직업은 농업, 수공업, 공업, 상업, 자유업 등이고, 직책은 군대, 사법, 교회, 행정부 등이다.
요컨대 민족에 대한 법률적 정의가 지배적이었던 시대에 시예스는 농업, 상업, 공업 등을 민족의 실체적 조건으로 제시했다.
그는 민족이란 농업, 공업, 상업 등의 직업과 공통의 법률 및 입법기관을 갖춘 집단이라고 했다.
법률이라는 형식적 조건에 기능이라는 역사적 조건을 덧붙임으로써 그는 왕당파의 가설이건, 루소주의적 가설이건 여하튼 그때까지 나왔던 모든 민족의 개념을 뒤집었다.
한 마디로 직업이나 직책, 기구들을 다른 모든 것에 우선 시켰다.
하나의 민족은 자체적으로 상업, 공업, 수공업의 역량이 있을 때에만, 그리고 군대, 사법부, 교회, 행정부를 구성할 능력이 있는 개인들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민족으로 존재할 수 있고, 또 역사 안에 진입해 역사적으로 존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농업, 수공업, 상업, 자유업 같은 직업을 실제로 수행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당시에 제3신분이라고 일컬어졌던 시민 계급(부르주아)이다.
누가 군대, 교회, 행정부, 사법부를 움직이는가? 물론 상층의 중요한 직위는 귀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 이 기구들의 10분의 9는 제3신분에 의해 그 기능이 수행되고 있었다.
결국 그는 “제3신분이 완벽한 민족이다” 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유도된 결론은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형성한다는 것과, 민족의 역량은 부르주아 계급만이 갖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결국 민족이라는 개념 하나로 부르주아는 근세 이후 보편 계급으로 우뚝 올라섰다. (지금 ‘우리민족끼리’를 외치는 사람들의 민족 개념도 실은 어느 진영의 헤게모니 쟁취의 전략일 뿐이다)
지극히 객관적으로 보이는 역사 기술(記述)은 사실 언제나 그 기술자의 이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는 신화화 작업이 이어진다.
한양대 임지현 교수는 그런 점에서 한국사 또는 동아시아 역사에서의 민족주의 논쟁은 매우 위험하고 시대착오적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중국이라는 실체도, 한국이라는 실체도 없었던 2천 년 전의 고구려에 20세기(근대 동아시아의 경우)에 와서야 등장한 근대 국민 국가라는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인식론적 오류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 이야기가 아니다)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 불어불문학 전공-서울대>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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