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2020년 10월 14일 국립 대전현충원 사회공헌자묘역에 안장됐다.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사진=연합
10년 전 오늘, 전 노동당 비서 고 황장엽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2010년 10월 10일 아침이었다. 거주하던 안전 가옥의 욕조에서 심장이 멈춘 채 발견됐다. 향년 87세, 1997년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오신 지, 13년 만이었다.
1990년 중반 어느 날, 황장엽 선생의 셋째딸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어느 날 아침에 누가 문을 두드려서 나가 보니 어린 학생 두 명이 새까만 손을 내밀며 밤 좀 달라고 해요. 우선 손부터 씻게 하고는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더니,
“어머니, 아버지가 다 굶어 누워 우리만이라도 나가 얻어먹으라고 해서 남포에서 (평양까지) 걸어왔어요”라고 대답하는 거예요.“
황장엽 선생은 아사자의 통계를 김정일에게 보고하는 조직부 간부에게 구체적인 내용을 전해 듣기도 했다. ‘작년(1995년)에는 당원 5만 명을 포함해 50만 명이 굶어죽었고, 올해에는 벌써 100만 명이 굶어죽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황장엽 선생님은 대규모 아사사태를 북한 체제의 붕괴 신호로 해석했다.
“1997년 초, 북한은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나는 이대로 나가면 5년을 넘기지 못하고 완전히 붕괴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중략)
러시아는 북한을 도와줄 능력이 없었다. 중국과 김정일의 관계도 악화될 대로 악화된 상태였다.”(황장엽 회고록)
황장엽 선생은 죽음의 행렬을 멈출 수 있는 길은 ‘탈출’뿐이라고 생각했다.
빨리 한국으로 가서, 북한의 실상을 알리고 남한 동포와 힘을 합쳐 김정일을 제거하는 것이 기아와 빈곤, 극심한 인권 유린에서 신음하고 있는 북한 주민을 구원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문제는 자신이 탈출할 경우, 남겨진 이들에게 닥칠 고통과 죽음이었다.
‘가족과 동지들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는 그 길이 과연 바른 길인가. 엄청난 희생을 보상할 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인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번뇌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던 황장엽 선생은 결국, 탈출을 결행했다.
황장엽 선생은 회고록에서, ‘(만약 내가 결단하지 않는다면) 먼 훗날 역사는, 그때 북에서는 그렇게도 엄청난 폭력과 불합리 속에 인민들이 고통받고 있는데도 당당하게 나서서 비판하거나 저항한 지식인이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말할 것’이라는 ‘민족적 양심’의 목소리에 내몰렸다고, 고백했다.
모든 것을 버릴 각오로 한국에 도착했지만, 한국은 황장엽 선생이 생각하던 곳이 아니었다. 황장엽 선생은 김영삼 정부 말기에 망명을 결행했다. 새로 들어선 김대중 정부는 이전 정부와 대북정책이 달랐다.
황장엽 선생의 구상은 한국 정부와 협력해 김정일 정권을 제거하고 북한 주민을 굶주림과 인권유린에서 구하는 것이었으나,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은 김정일과 손을 잡고 한반도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만나고 있는 박지원
선생의 회고록에는 당혹스럽고 고통스러운 당시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와서 보니 한국은 오히려 북한의 붕괴를 막기 위하여 김정일 정권을 지원하는 데 앞장서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대북정책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대통령 직속기관인 국정원의 태도도 달라졌다.
나는 하루 아침에 그들의 귀중한 보호대상에서 위험한 통제대상으로 바뀌고 말았다. 무력감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이러고도 혼자 남아 살아갈 자격이 있겠는가?”
그러나 황장엽 선생은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나에게는 죽을 권리도 없다. 마지막 힘을 다해 투쟁할 의무만이 있을 뿐이다’며, 자신을 다독이며,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북한의 실상을 알리고, 북한의 민주화와 북한 주민의 인권 개선을 위한 투쟁에 매달렸다.
황장엽 선생의 아내는 수용소에 끌려가기 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세 딸과 아들, 그리고 동료와 제자들은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의 희생으로 시작된 황장엽 선생의 투쟁은 10년 전 선생의 죽음과 함께 참담하고 쓸쓸한 패배로 끝난 것일까?
황장엽 선생님 망명 이후, 국내외에는 북한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일하는 단체들이 크게 늘었다. 유엔은 해마다 북한 주민의 인권 개선을 위한 결의안을 채택하고 있다.
2016년에는 논란을 거듭하던 북한인권법이 제정되고, 통일부에 북한인권과가 만들어졌다. 황장엽 선생님의 투쟁을 자양분으로 삼아 피어나고 있는 북한민주화의 새싹들이라고 믿는다.
이 작은 싹이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어, 언젠가 북녘땅을 뒤덮는 그 날이 오기를, 가난과 독재 속에서 고통받는 2천5백만 북한 주민이 인간답게 사는 자유와 해방의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by: 이광백 (데일리 NK 대표)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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