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이민 초기 한인들의 사진. <출처: 연합뉴스>
하와이(현지 발음은 ‘후와이’ Hawaii)는 북태평양에 작고, 큰 137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群島)를 이루고 있는데, 우리나라 제주도의 8배 정도의 크기이다. 이 137개의 중에는 대개 사람들이 살수 없는 작고 메마른 섬이 대부분이고, 이중에서 사람들이 거주하는 섬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8개의 섬이다.
섬 전체 면적의 크기를 순서대로 살피면, 큰 섬(Big-Island: 이 섬이 하와이 섬이라 불린다), 마우이(Maui), 오하우(O’hau), 카우아이(Kaua’i), 몰로카이(Moloka’i), 라나이(Lana’i), 뉘하우(Niihau), 카후라위(Kahoolawe) 섬이다.
이 중 하와이 섬이 가장 큰 섬이기에 이 지역을 통칭 하와이라고 부른다. 이곳의 기후는 연중 여름날씨로 고온다습하며, 유황과 용암분출로 이루어져 뱀이 살 수 없는 땅이다. 인구로 보면 호놀루루가 있는 Oahu 섬에 하와이 인구 절반이상 살고 있다.
하와이가 서구에 알려지게 된 것은 영국의 해군 장교이며 탐험가였던 James Cook 선장이 1778년에 이 섬들을 발견하였다. Cook 선장은 이 섬들을 Sandwich 군도라고 명명하였다. 이때 하와이는 여러 개의 왕국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전사 출신 Kame-hameha 1세 왕이 1810년에 이 섬들을 모두 정복하여 통일왕국을 건설하였다 (현재 주청사 앞에 그의 동상이 있음).
그후 기독교 선교사들과 기업가들이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위협을 받게 되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은 Kame-hameha II세는 선왕이 별세한 1819년부터 서양인들에게 호의를 베풀게 됨으로써 Hawaii 왕국은 점차 주권을 잃어가고 말았다. 따라서 그가 죽은 이듬해인 1820년 3월 30일에 New England의 조합교회(Congregational Church) 선교사가 처음 하와이에 오게 됨으로써 기독교가 구체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1839년까지 총인구 13만 가운데 약 15,000명의 조합교회 교인이 늘어났다. 1835년에 Ladd and Co.라는 회사가 Koloa 사탕수수 농장을 Kauai 섬에 설립함으로 많은 농장들이 세워졌다. 그래서 1843년에는 미국인들이 실질적으로 하와이를 장악하게 되었다.
◊1897년 개항초기 제물포항 일대 / 사진제공 : 인천항만공사)
〈한국의 최초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
1902년 12월 22일 최초의 조선인 121명으로 구성된 이민단이 제물포(인천)를 떠났다. 선창가에는 존스 목사가 나와 기도회를 인도하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하와이 감리사에게 보내는 소개장도 주었다.
인천항을 출발하여 일본 고베(神戶)에 도착하여 신체검사를 받은 결과 20명이 탈락되고, 101명(김흥찬은 102명으로 기재)이 12월 29일에 미국 상선 겔릭호(Gaelic, Oriental and Occidental Steam ship Co. 소속, 사진)를 타고 하와이로 출발하여 1903년 1월 12일 (화요일) 자정에 항구에 도착하였고, 13일 새벽 3:30분에 호놀룰루 항구에 정박하였다.
이들 첫 이민자들은 관례를 벗어나 부두에서 검역과 입국수속을 받지 않고 배에서 받았다. 여기서 검역관의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안질이 있던 15명이 다시 상륙 허가를 얻을 수 없어 돌아가고 결국 86명(남자 48명, 여자 16명, 어린이 22명)만이 호놀룰루에 상륙하게 되었다.
인솔자는 이민회사의 총무일을 보던 장경화 전도사였고, 통역은 안정수 권사(후에 뉴욕한인교회 세우는데 공헌)와 정인수였다. 나중에 하와이에서 활약이 많았던 김이제 권사(26세) 부부와 신앙의 지도를 위해 홍승하 전도사도 있었다.
▲존스 목사는 1893년 제물포에서 한국 최초 신학교육인 신학반을 개설하고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존스 목사(가운데)와 신학생들
이들을 환영하던 이들 가운데는 인천 내리교회의 존스 목사로부터 미리 연락을 받고 나온 하와이 선교감리사인 피어슨(George L. Pearson)목사가 있었다.
안정수 권사는 농장주협회 노동부의 통역이 되었고, 정인수는 다른 이민자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오아후(Oahu)섬의 서북 끝에 있는 모쿠레아 농장(Mokuleia Camp in Walalua Plantation)으로 가서 일하게 되었다.
하와이를 출발한 갤릭호는 13일 저녁 6시 반에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당시에도 이민국이 지금의 자리에 있었고, 이민수용소는 지금의 샌드 아일랜드이다.
1910년에서 1924년까지 뒤늦게 남편을 찾아온 부인네들과 자녀들, 또 결혼을 하려고 온 여성들이 남편이나 신랑될 사람이 다른 섬에서 미처 오지 못하여 이 수용소에 머물며 기다렸다. 또 눈병 등 간단한 질환이 있는 사람들도 완쾌될 때까지 며칠동안 이곳에 머물렀다.
한인 이민이 도착한 1903년은 하와이가 미국에 병합된 지 10년이 지난 후이고, 또 미국의 영토가 된지 5년 후였기 때문에, 한인 이민들의 입국수속은 미국 이민국이 담당하였다.
1903년에서 1905년 동안 이민 온 한인들은 대한제국에서 발행하는 집조(여권)를 가지고 도착하였다. 식구가 같이 왔을 때, 미성년자와 부인은 가장의 여권에 같이 기재된 가족여권을 가지고 온 이들도 있다. 아이들의 이름은 밝혀져 있으나, 부인의 이름은 밝히지 않고 “부인”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점한 후에 도착한 한인들은 일본이 발행한 여권을 가지고 왔다.
2차 이민단 90명은 1903년 2월 10일에 제물포를 떠나 일본 나가사끼에서 콥틱(Coptic)호를 갈아타고 3주만인 3월 3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신체검사에 통과된 63(혹은 59)명이 하와이 땅을 밟았다. 이 배에는 통역관으로 현순(玄楯, 1879-1968)목사가 탑승해 있었다. 이들은 호아후 섬 북쪽에 있는 농장(Kahuku Plantation)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도착하자마자 카후쿠(Kahuku)농장으로 갔다. 이곳은 기후가 온화하며 사시사철 꽃이 피며 열대성 열매가 많이 생산되고 있어 그야말로 지상낙원이었다.
다음해인 1904년 33척 선편으로 3,434명, 1905년에는 16척에 2,659명이 도착하여(1905년 5월 18일 288명이 마지막으로 도착) 하와이 노동이민자의 총합은 7,226명이 되었다.
1903년 3월 19일 72명 호놀룰루에 도착; 4월 30일 113명 도착, 1904년 6월 1일 130명 도착, 7월 8일 176명 도착, 7월 30일 244명 도착, 9월 26일 152명 도착, 1905년 3월 31일 276명 도착, 4월 5일 191명이 도착했다.
이중 983명은 너무도 고된 노동으로 고국으로 되돌아갔으며, 2천 명에 한 명이 모자란 1999명이 여자 한 명과 함께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고, 이후 여기서 다시 각 주로 분산되어 살게 되었다.
최초의 이민선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1903년 1월 13일부터 일본의 제지로 이민이 중단된 1905년 7월까지 65척의 선편으로 7,226명(남자 6,048명, 여자 637명, 어린이 541명)이 하와이로 들어왔으나
이들 중 479명이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받아 되돌아갔으므로 1903-1905년 사이의 하와이로 이민 온 한인 노동자는 총 6,747명이었다.
◊하와이 한국인 교회 앞에 모인 한국인 이민자들. 교회는 이들 이민자들의 중심 활동지로 기능하였다. <출처: 연합뉴스>
이민자 중 농부는 불과 1/7이었고, 대부분은 막노동자들 이었다. 또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 전체의 약 65%나 되었다.
최초 이민자들 가운데는 교인들이 많았고, 목회자, 유학생, 향리의 선비, 광부와 군인, 농촌의 머슴, 역부, 건달 등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 중 기독교인이 약 20%가 되었다고 한다. 이들 대부분은 돈을 벌어서 조국이 독립만 되면 돌아갈 생각이었고 미국에 영주할 의사는 전혀 없었던 임시거주자(sojourners)들이었다. 이들은 하와이 각 섬에 있는 40여 개 농장으로 분산되었다.
그들이 한 곳에 30여명으로부터 많은 곳은 2,3백 명까지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노동에 종사하였다.
작업은 자연생의 잡목들을 자르고 정리 작업을 하여 농토가 조성되면 거기에 관개시설을 하고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도착한 한인들의 생활은 거의 노예생활이었다.
카우이 섬 콜로라 농장에서 일하던 이홍기 옹의 당시의 경험담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4시 30분에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새벽 5시에 일터로 나가서 5시 30분부터 일을 시작하여 오후 4시 30분까지 일을 했다. 점심시간 30분이 고작 휴식시간이었다.
십장은 하와이말로 루나(Linas)라 불렀는데 나의 십장은 독일인이었다. 그는 매우 엄격했다. 일하는 동안 허리를 펴거나 담배를 피울 시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루나(십장)는 우리를 마치 소나 말과 같이 그들을 채찍으로 다스렸다. 노동자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마치 죄수처럼 번호로 불렀다. 만일 누구나 그의 명령을 어기면 보통 뺨을 맞거나 사정없이 채찍으로 때렸다.
나는 막사에서 살았다. 숙소는 사병들의 막사같이 생긴 판잣집이었다. 한 칸에 미혼 남자 네 사람씩 기거했다.
이부자리는 한사람 당 담요 한 장뿐이었다. 가끔 난 찌는 듯한 실내 온도로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리고 밥은 조석으로 손수 지어먹었다. 주일은 쉬었다.
그러나 아무런 오락시설도 없어 노동생활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주말 모임을 가지기도 하나, 더러는 방탕한 생활에 빠지기도 하였다.
심한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향수심에 걸려서 생활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들도 있었다. 일당으로 남자는 67센트, 여자는 50센트였다. 한달 월급은 16불이었고, 통역관은 30불이었는데 생활을 유지할 정도였다.” 라고 했다.
▲1906년 호놀룰루 한인 감리교회 성도들과 존스 선교사(가운데)
이런 생활가운데서 성도들은 농장단위로 교회(예배처소 수준)를 설립, 현실을 신앙으로 이겨나갔다.
하와이에서 처음 출생한 한인아이는 1903년 3월 3일(2차 이민단)에 도착한 현순목사와 부인 현 마리아 의 첫 딸 앨리스 현으로 5월 8일에 쿠울라우 지역(와이알루아와 카후쿠 농장이 있던 지역)에서 태어났다.
앨리스 현은 미국영토에서 태어났으니 미국 법에 따라 미국시민이 되었다. 그러나 부모를 따라 온 448명의 아이들과 4000여명의 어른들 대부분은 1952년 이후에야 시민권을 받을 수 있었다.
1904년 9월 26일에 부모와 함께 하와이에 이민 온 박 에스더는 1902년 평양에서 출생하여서 2살 때 왔는데 미드-퍼시픽 고등학교(Mid-Pacific High School, 1918-1922)와 하와이 대학을 졸업하였다(1922-1926).
하와이섬의 코할라 여학교에서 1년을 가르친 후 19년 동안 호놀룰루 YWCA에서 근무하였다.
1947년 뉴욕 YWCA 본부의 요청으로 1922년에 김활란 박사에 의하여 창설된 한국 YWCA의 고문으로 파견을 받아 30년 동안 한국 YWCA를 위하여 일하고 1977년 하와이로 돌아왔다.
박 선생이 한국에 파견되었을 때, 미국시민이 아니었으며, 한국 여권도 없었기 때문에 특별 허가를 받고 입국하였다. 박 선생이 미국시민이 된 것은 1955년 4월 22일로 하와이에 도착한지 41년 후이다.
초기 이민자 중 84%가 20대 남자였고, 이들의 결혼 문제는 큰 현안이었다. 결국 사진 교환을 통해 결혼하는 ‘사진 신부’들이 1910년부터 하와이로 이민가게 된다.
▲ 1913년 신랑이 될 남성을 찾아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여성들
1924년 미국 이민법에 의해 모든 형태의 한인 이민이 금지되기까지 총 1000명의 신부들이 하와이로 떠났다.
이들 첫 이민자들 가운데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1978년에 실시된 조사에서 파악된 이민 동기들은 참으로 다양했다.
하와이에 가면 빗자루로 땅을 쓸기만 해도 돈이 생긴다기에 그 돈으로 친정 식구들을 살리려고, 서자(庶子)라고 설움을 받아서, 예수쟁이라고 놀림받는 것이 싫어서, 남자들 횡포 때문에, 시부모를 안 모실 것 같아서, 일본인의 압박을 참을 수 없어서, 자손들을 좋은 나라에서 훌륭하게 교육시키고 싶어서, 모험심에서 등으로 다양했다.
이같은 하와이에로 노동이민의 물결은 1905년 하반기부터 돌연히 중지되게 되었다.
조선정부의 허락도 없이 일부 악덕상인들이 1904년에 멕시코로 가는 이민 1,033명을 모집하여 보낸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와이로 이민가는 줄을 알았는데 악덕상인의 장난으로 멕시코에 끌려가 노예생활을 하였고, 그들의 후예가 멕시코 유카탄(Yucatan)반도에 흩어져 살면서 아직도 미개한 생활을 하고 있다.
현재 한인 6세까지 있는데 한국말은 전혀 모르며, 스페인어를 쓰고 있다. 유카탄주의 Merida시 근처에 이들의 후예 약 15만명이 성씨별(강, 고, 김, 이, 박, 염, 서, 유, 장, 최, 홍씨 등 23개 씨)로 촌락을 이루고 살고 있다.
1993년부터 미주내 한인교회가 이들을 찾아내어 선교사역이 시작되자 이제는 그들이 여러모로 문화혜택을 받고 있음은 다행이다.
1905년에 맺은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조선 정부에게 이민을 중지하도록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하와이에 있는 일본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 1907년경에 하와이 노동이민이 거의 끊겼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초기 한인들이 태극기를 걸고 고종황제의 생일 축하행사를 가졌다.(1907년)
1910년 미국 인구조사에 의하면, 하와이에 살고 있는 한인의 수가 4,533명이며 그중에 농장 노동자는 1,787명이었다. 한인의 60%가 농장을 떠나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20년에 전체 한인 4,950명의 27%인 1,300여 명이 호놀룰루를 주거지로 삼았다.
당시의 교통수단인 기차로 시골농장에 다녔고, 시내에는 전차가 있었다. 그렇다고 한인들이 쉽게 전차를 타고 여기저기 다니지도 아니 하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한인 단체 사무실과 한인들의 교회가 어디에 있었나를 미루어 보면 한인들이 모여 산 곳을 짐작할 수 있다.
21세기가 시작된 현재에도 초기 이민자의 45명 정도가 생존해 있으며, 이중 6명이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출처: https://4000migrant.tistory.com/entry/한국의-이민-역사 [사천다문화통합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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