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에네껜 농장 이주
중남미 지역의 한인 이주 역사를 살펴볼 때, 한인의 범위는 이주할 당시 대한민국 국적을 가졌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 역사에서 한민족이라고 분류될 수 있는 사람들을 모두 포함한다.
따라서 조선 말기에 조선인의 신분으로 이주한 사람들, 일제 식민지 시기에 일본국 조선인으로 이주한 사람들, 한국 전쟁 직후 이주한 ‘중립국포로’의 범주에 속하는 청년들은 민족이라는 범주를 통해 이주사에서 연속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
중남미 지역의 초기 이주는 1905년 5월 15일,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메리다(Merida)주에 도착한 1,031명의 조선인 계약노동자(con-tract laborer)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멕시코는 디아즈 (Diaz)정권 하에서 미개발 지역을 중심으로 경제 발전과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 때 경제 개발의 주된 단위가 된 것은 전근대적 고용관계에 기초한 대농장, 이른바 아시엔다(hacienda)였는데, 이것은 무엇보다 노동력 부족으로 곤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디아즈 정부는 894년 식민법(Law of Colonization)을 통과시킨 후, 노동력과 자본의 확대를 위하여 외국 이민을 유치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원래의 의도는 유럽인 이민과 자본 유치를 통한 백인화(whitenization)정책이었으나, 미국이나 아르헨티나만큼 성공적인 결과를 얻지 못해 노동력의 원활한 공급에 더욱 추중하게 되었다.
일본, 중국, 조선의 풍부한 노동력은 멕시코 정부와 농장주들에게 대단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이민의 성격과 사회적 위치는 상이했지만, 1897년 경부터는 일본인, 1899년 경부터는 중국인의 멕시코 이민이 어느정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시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던 노예들의 모습
이러한 멕시코의 상황은 1905년에 이르러 조선의 상황과 연결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한 이후 주변 열강들의 세력 다툼 속에서 민중들의 경제적 궁핍이 극에 달하였다.
1904-1905년에 있었던 러일 전쟁은 기아와 약탈을 더욱 심화시켰으며, 무엇보다 농민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와 일자리를 박탈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국외 이주가 더욱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경제 생활의 개선과 안전한 곳에 대한 열망은 만주와 연해주 등을 넘어 1903년부터는 하와이의 계약노동자 이주가 붐을 이루게 하였다.
1903-1905년 사이 하와이로 이주한 사람의 수는 7,000여 명에 달하였다. 결국 멕시코로의 계약노동자의 이주는 러일전쟁 이후 조선의 불안정한 상황과 하와이 계약노동의 선례가 맞물려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계약노동(contract labor)이란 근대 자본주의적 임노동 관계가 성숙되기 어전 유럽 등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지던 노동 관행으로, 원칙적으로는 피고용 노동자가 정해진 계약 기간 동안 정해진 임금을 받고 일하는 일종의 임노동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제의 역사적 조건 속에서 그것은 주로 토지에서 축출되어 생계가 막연해진 농민 노동력을 흡수하는 장치가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계약노동자들은 계약 기간 동안 고용주에서 전근대적 노예나 농노와 다름없는 예속 관계를 맺고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멕시코 특유의 농장 형태인 아시엔다에서 20세기 전후 계약노동은 노동력 충원의 주요한 형태 가운데 한로 자리잡고 있었다. 1904년 10월 15일부터 조선 각지에는 4개월 동안 멕시코의 계약 노동자를 모집한다는 광고가 붙었다.
조선인 계약노동자 모집을 주선한 사람은 영국인 중개업자 마이어스(Myers), 일본인 다시노 가니찌, 조선인 이준혁이었는데, 이들은 자기들끼리 비밀 협정을 맺고 노동자 모집에서 과장된 전망과 이주 생활을 홍보하였다.
한편 대한제국 정부는 이들의 사기음모를 눈치채지 못하였기 때문에, 모집 과정에 개입하지 못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하와이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불분명하고도 과장된 풍문들이 나돌고 있었다.
그 내용은 사탕수수 농장으로 간 노동자들이 많은 돈을 벌고 있고 계약 기간이 끝나면 금의환향 하리라는 것이었다. 여기에 맞추어 멕시코 유카탄의 녹색 황금에 대한 소문도 인천, 원산, 부산, 목포 등의 항구도시에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1905년 2월 집결지인 제물포항에는 1,033명의 계약노동 희망자들이 모여들었다.
◊1904년 황성신문에 실린 ‘농부모집광고
광고 전단에 명시된 모집 조건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40세 미만인 자, 불구가 아닌 자. 남자를 따라가는 여자는 받아들임. 15세 미만인 어린 아이들은 받아 주기는 하되 노동자로 취급하지 않음.
계약노동 주선자들은 희망자들에게 150원의 선금을 주고, 4년의 계약 기간을 명시한 계약서를 작성하였다.
계약서에 서명한 조선인 이주자들 대부분은 그들 로부터 계약 조건을 명확하게 듣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계약서에 무엇이 적혀 있는 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계약한 조선인 이주 노동자들은 802명의 남자들 가운데는 전직 군인(당시 군대 조직이 해체되면서 생겨난)이 가장 많았고, 농민, 수공업 노동자, 광부, 벌목꾼, 노비 출신자 등이 주로 포함되어 있었다.
멕시코로의 출발은 여권 발급 관계로 1개월가량 늦어진 1905년 3월 5일 인천항에서 이루어 졌다.
계약노동을 주선한 중개인들과 거래를 맺은 선박회사의 대우가 어떠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약2개월 간의 항해를 끝내고 5월 초 멕시코 서부해안 살리나 크루즈(Salina Cruz)에 도착했을 때 1,033 명의 승선 이주자들 가운데 사망자2명을 제외한 1,031명은 대체로 건강하게 멕시코 땅에 내렸다.
이후 이들은 기차로 멕시코 동해안의 코아차코알로스(Coatzacoalos)로 수송되었고, 다시 배를 통해 프로그레소(Progreso)를 거쳐 1905년 5월 15일 드디어 최종 목적지인 메리다의 에네껜 (hene quen)농장 지역에 도착하게 되었다.
역 근처에서 수일을 노숙한 후 계약노동자들은 인근 지역 약25개의 아시엔다에 10-50명씩 분산 되어 팔리게 되었다. 계약노동자들의 농장 생활은 떠날 때의 기대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아시엔다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었으나, 대체로 노예의 생활과도 같은 것이었다.
계약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은 멕시코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그들의 생활과 문화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고, 언어에 있어서는 스페인어, 유카탄 원주민 언어인 마야어 어느 것으로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으며, 많은 사람들은 모국어조차도 글로 쓰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중개인들로부터 들었던 계약 조건들은 모두 허위로 날조된 것이었다. 4년간의 노동 계약은 사실상 4년간의 노동으로 갚아야 할 부채계약과 같았다.
1인당 하루 노동의 품삯은 어른이 35센트, 청소년이 25센트, 어린이는 12센트였으며, 관습적으 로 규정된 하루의 노동시간은 12시간 정도였다.
당시 25센트와 교환할 수 있었던 것은 쌀 2흡과 빵 9조각, 약간의 검은 콩 및 옥수수였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품삯을 받아 금전을 모으기는 커녕 어른 한 명의 품삯으로는 생계를 이어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주를 하는 과정에서 든 경비와 계약 당시 받았던 선금은 모두 갚아야 할 부채로 계산되었다.
새벽 4시경 기상벨과 함께 일어난 노동자들은 일터로 나가서 날이 저물 때까지 노동을 하고 돌아오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노동자들은 일터뿐만 아니라, 집에서의 거주까지도 감독을 받았다. 밤에 이들이 거주하는 단칸방 움막은 열쇠가 채워졌으며, 다른 집이나 아시엔다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감독관이나 농장주로 부터 통행증을 얻어야만 했다.
농장주들은 조선인들뿐만 아니라, 이러한 노동자의 다수를 이루고 있던 인디언과 조선인 이전에 이주해 있던 중국인 노동자들을 감시하고 이들에게 노동을 강제하기 위해서 중간 감독관과 경찰들 을 고용하였다.
노동자들의 작업과 생활의 통제에서는 자주 채찍을 비롯한 체형이 가해졌고, 따라서 일하던 아시엔다를 벗어나기 위한 도망자들이 속출하였다.
도망자들은 대부분 얼마 못 가 잡혀 돌아왔 으며, 계약 조건 위반으로 감옥에 갇혀서 처벌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이때의 처벌은 평소의 고된 노동과 생활에 비하면 차라리 휴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1909년 5월에 4년으로 정해진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조선인 계약노동자들은 법적으로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하지만 경제적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이들에게 법적 자유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계약 기간이 지나서도 별다른 생계의 대안을 찾지 못한 채 아시엔다에 그대로 고용되어 있었다. 그런데 조선인 노동자들은 사실 멕시코 원주민 인디언들에 비해 농장주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조선인들은 그들에 비해 매우 열심히 일을 했고, 무리한 작업 강요에 대해서도 순종적이었다. 반면 동양에서 온 중국, 조선, 일본인 노동자들과 경쟁관계에 있던 원주민 노동자들의 태도는 이들에게 매우 적대적이었다.
그들의 눈에 동양인 이주노동자들은 그저 돈만 아는 일벌레로 비쳤고, 중국인이나 일본인에 비해 소수였지만 조선인 노동자들 역시 그런 인상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1910년에 일어난 멕시코 혁명은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급변시켰다.
농장주들과 연결된 지배 세력이 무너지고 농민, 노동자 및 중산층에 지지 기반을 둔 혁명 세력이 등장함으로써, 조선인들을 비롯한 동양인 노동자들에 대한 적개심은 사회적으로 더욱 증폭되었다.
결국 이러한 멕시코 내의 상황은 조선인 이주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적응 형태와 선택을 요구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조선인들은 점점 늘어나는 사회적 압력에 대응하여 한인회 조직 등을 통해 내부적인 부조와 결속 을 강화하는 한편, 일부의 사람들은 멕시코 이외의 다른 중남미 지역으로 재이주를 결행하게 되었다.
유카탄에서 타지역으로의 이주는 1913년부터 시작되어 주로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향해 졌다.
1921년 3월 초 멕시코 이주노동자들 가운데 약 300명은 쿠바로 대대적인 이주를 하였다.
◊1910년경의 태극기를 걸고 서있는 멕시코의 조선인들
▲ 메리다 시의 중심부인 산티아고 광장 앞에 위치한 이 ‘제물포(인천) 거리’는 가슴 뭉클한 탄생 배경을 갖고 있다. 에네켄 농장의 한인 광부가 이 동네 한 바에서 술만 마시면 곧잘 “제물포, 제물포, 제물포!”를 외쳐댔고, 그러면 주위 사람들도 같이 외치곤 했다. 바의 주인은 왜 그리 구슬프게 ‘제물포’를 연호하는지 까닭을 물었고, 그 절박한 외침이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로 시작되는 흑인 영가(한 늙은 흑인 노예가 고향 버지니아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심정을 담은 미국 가곡)의 사연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감동한 주인은 주점 상호를 ‘제물포’로 바꾸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 일대 거리 이름도 아예 ‘제물포 거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왼쪽 건물이 바로 ‘제물포’ 술집. 현재는 정부 소유 전당포(멕시코 전당포들은 모두 국영이란다)로 운영되고 있다.
▲ 제물포 거리에 붙어 있는 현판. 2007년 10월 15일 대한민국 인천광역시에서 설치했다고 새겨져 있다.
출처: https://4000migrant.tistory.com/entry/한국의-이민-역사 [사천다문화통합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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