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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은파 한은우 목사님에게 “당신이 오실 날을 기다리며 전 오늘도 밤을 지새우고 있습니 다”-서부동산교회 최흥욱 목사-

〈고 은파 한은우 목사〉

당신이 오신다기에 당신이 오신다기에 전 아무 일도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오실 날을 기다리며 전 오늘도 밤을 지새우고 있습니다

별빛도 당신 얼굴 달빛도 당신 얼굴 앞마당에 피어있는 살구꽃 앵두꽃도 모두 당신 얼굴 뿐 입니다

이 봄이 다 가기 전에 당신이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살구꽃 앵두 꽃 다 지기 전에 어서 당신이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올 당신 오신다는 생각에 오늘도 전 잠 못 이루고 뒤척이고 있습니다

-서부동산교회 최흥욱 목사-

〈고향 교동 보리밭에서최흥욱 목사와 함께하신 고 은파 한은우 목사〉

강화도에서 내려 다시 배를 타고 가야 하는  작은 섬에 부잣집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 아들은 딸만 여섯인 가정에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나서 사랑을 독차지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그가19살 청년시절에 폐병이 깊어져 음식을 입에 떠 넣을 수 없을 정도로 절망에 빠졌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병실에서 신약성경을 읽었습니다.

그 중 마가복음 10장에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부르짖는 대목에서 깊은 충격을 받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믿음의 불이 붙었습니다. 사경을 헤매면서도 이런 기도문을 만들어 아침 저녁으로 기도했습니다.

“이팔청춘 꽃다운 몸으로 세상을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진대 한 번만 살려주옵소서! 그리하면 이 몸을 주 앞에 바쳐 죽도록 충성을 다하리라. 불가불 죽어야만 된다면 지옥에 보내지 마옵시고 천당에 보내시옵소서! 아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죽을 줄 알았던 그 청년이 살아났습니다. 신학교를 나오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런 확실한 체험이 있은 후부터 그는 성령의 불길에 온전히 휩싸여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받들어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가슴 속에 타오르는 성령의 불길은 지금까지 나라 안에 20교회, 해외에 4교회, 모두 24교회를 세워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고향인 강화군에 지석교회, 이강리교회, 중앙교회, 인사교회, 서한교회, 양갑교회, 무학교회, 고구리교회, 화동교회를 세웠으며,

그 밖에 동산교회, 도천교회, 춘당교회, 우천교회, 횡성제일교회, 임천교회, 은파교회, 은천교회, 은광교회, 서부동산교회, 남부동산교회를 세웠고,

나라 밖으로 미국 나성동산교회, 영국 런던 벳새다동산교회, 미국 시카고 임마누엘교회, 멕시코 동산교회를 세웠습니다.

그가 바로 은파 한은우 목사님이십니다.

그는 교동섬의 믿음의 아버지로서 교동섬과 강화 사람들은 그를 ‘걸어다니는 사도행전’, ‘믿어보자 한은우’, ‘강화 예수’라고 부르기까지 하였습니다

나로 나되게 하신 믿음의 아버지 한은우 목사님과 나와의 만남은 아마도 숙명적인 만남의 관계라 해야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럴만한 선명한 이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은 6ㆍ25를 만나 연백군 연백읍에서 경기도 강화군 교동면 지석리로 내려와 사는 중에 목사님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때 내 나이 두 살이었는데 인가귀도의 축복이 목사님을 통해 임한 것입니다.

그 후로 목사님께서 서울로 올라오시기 전까지 줄곧 우리 아버님은 장로로서, 어머님은 속장으 로서 사명을 받아 교회를 받들어 왔습니다. 목사님 밑에서 우리 가족 모두가 믿음의 지도를 받게 된 것입니다.

〈한국교회 최초의 기도원인 용문산 기도원 정문에서최흥욱 목사와 함께 하신고 은파 한은우 목사님〉

내가 감리교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된 것도 목사님의 기도의 열매로 된 것입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갑자기 몸에 열이 나고 정신이 혼미해져 있을 때에 목사님께서 우리 집에 오셔서 내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실 때 열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정신도 깨끗이 돌아오는 신기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어린 나이에 나는 서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도 앞으로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한은우 목사님 처럼 병든 사람들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내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명감이 넘쳐서 주께서 가라고 하시면 어디든지 가리라고 목회 임지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 때 목사님께서 나를 경기도 이천군 설성면 제요리에 보내주셨습니다.

시골 밭에다 15평 천막을 치고 교회 개척을 시작하였는데 이 교회가 이천 남지방 은광교회요, 이것이 내 목회의 첫 시작이 되었습니다.

은광교회에서 6년, 교회와 목사관을 세우고 사역하고 있는데 어느 날 밤 갑자기 목사님께서 전화를 걸어오셨습니다. 앞으로 2년 동안 미국에 가서 공부도 하고 교회도 개척하려고 하는데 그동안 동산교회를 맡아 부목사로 일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3년 동안 부목 아닌 담임(?) 역할이나 마찬가지인 위치에서 동산교회를 돌보게 된 것입니다.

미국에서 돌아온 목사님께서는 그동안 충성을 많이 했다고 하시며 은평구 증산동에 동산교회의 한 속회를 떼어주시면서 교회를 시작하게 해주셨습니다.

7가정 12명의 성도가 중심이 되어 30여 평의 건물을 얻어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서부동산교회입니다.

〈서부동산교회 마당 기념돌 앞에 선 고 은파한은우 목사님과 고 신순녀 사모님〉

이렇듯 내 삶의 정서 속에는 목사님이 항상 자리 잡고 계십니다. 한은우 목사님, 그분은 분명히 오늘의 나를 나되게 하신 믿음의 아버지이십니다.

지금까지 가까이서 또는 멀리서 목사님을 모시고 지켜보면서 정말로 우리 모두가 마음속에 품고 살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목사님은 꿈을 심어준 큰 스승이십니다. 목사님은 꿈을 먹고 사는 지도자요스승이었습니다.

그 분은 희망으로 오늘을 살아갑니다. 미래에 대한 꿈은 마침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에게서 꿈을 받아먹은 수많은 젊은이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이 사명을 발견하고 목회를 지망하게 되었고 지금 초교파적으로 헌신적인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지금 목회자들이 되어 우리 한국 영계에 큰 사단이 되어 놀랍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큰 가르침 밑에서 51명의 목사와 14명의 전도사가 배출되어 뜨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 목사로서 일하고 있는 이들은 고희집/ 한명수 /김영상/ 안태민/ 박용식/ 한기익/ 한기형 /최흥욱 /한영식/ 권혁구/ 민승/ 윤송현/ 김형기/ 김옥렬/ 홍중양/ 차경식/ 백승억/이창순/ 박수웅/ 전종욱/ 한성현/ 김웅태/ 김홍진/ 안병선/ 한성대/ 문문찬/ 신광섭/ 양우석/ 권원택/지일권/ 임성열/ 박철주/ 고홍기/ 최남순/ 유장춘/ 황창진/ 김영진/ 이종환(A)/ 이종환(B) /곽성자/ 정관교/ 고은기/ 정봉기/ 윤경식/ 남순우/ 남관우/ 이광보 /황재환/ 전영배/ 정명기/ 박승학 등이 있으며,

전도사로 일하는 이들은 박명숙/ 이희철/ 민대순/ 이순임/ 허순녀/ 정병기/ 권민철/ 윤경숙/ 안창훈/ 홍종혁 /강도화/ 김정옥/ 이영선/ 남준우 등입니다.

〈서부동산교회에서 최흥욱 목사 내외와 함께 하신 고 은파 한은우 목사님과  고 신순녀 사모님〉

한은우 목사님, 그분은 이제 목회일선에서 물러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꿈을 꾸고 계십니다. 이제부터는 전과는 다른 새로운 역사가 터지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3헐 목사님이십니다. 성경을 너무 많이 읽어서 성경책이 헐고, 기도에 미쳐서 무릎이 헐고, 양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니셔서 구두가 헐어버린 3헐 목사님이십니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았고, 듣고 배운 것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나는 영원히 목사님의 사랑과 은혜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앞으로 펼쳐지는 목사님의 삶 위에 임마누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주후 1995. 4. 16. 부활절 새벽에 최흥욱 목사-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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