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liam Kim (Voice of America – VOA Senior Staff Reporter )
김정은이 6·25전쟁 정전협정 기념일인 지난 27일 전국노병대회에서 한 연설은 역사 왜곡이 매우 심각했습니다. 하지만 언론과 전문가들은 그의 “핵 억제력 안전 담보”에만 집중.
김정은은 핵 억제력 주장을 하는 근거로 70년째 우려 먹는 미제 침략이란 거짓말을 반복합니다. 미제 침략자들이 당시에는 우리를 만만하게 봐서 침공했지만, 수령과 자신들은 승리했으며 이제는 핵무기가 북의 안전을 담보해 준다는 궤변이지요.
심각한 문제는 대부분의 북한 주민들이 여전히 이런 역사 왜곡과 궤변을 그대로 믿는다는 겁니다. 북한 정권은 이런 왜곡을 통해 인민들에게 미국과 남조선 괴뢰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도록 탁아소 때부터 교육합니다.
최근 DMZ 인근에서 있었던 국군 유해발굴 캠프에 참가했던 한 탈북 청년은 전쟁 역사를 제대로 깨우친 뒤 “나는 사기를 당했다”며 울분을 삼켰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이런 왜곡된 역사관을 가진 채 남북 지도부가 추진하는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속가능한 걸까? 여러 의문이 제기됩니다.
그래서 김정은의 여러 발언에 대해 팩트체크를 했습니다. 방송 시간 때문에 축소된 기사의 원문을 아래 소개합니다. 북한 주민들뿐 아니라 해외 파견 북한인들, 설문조사 결과 6·25전쟁이 언제 발생했는지조차 모르는 절반 이상의 한국 청년들이 전쟁 역사를 제대로 알기를 바랍니다.
[김정은: “미제와 그 추종세력의 군사적공세를 막아내고 우리의 령토와 자주권을 피로써 사수해낸 것은 우리 민족사와 세계혁명사에 전무후무한 영웅신화를 아로새긴 특대사변이였습니다.”
“미 제국주의의 침략성과 야수성”, “침략자들과의 싸움”을 언급하며 여러 차례에 걸쳐 수령과 로병들이 이런 미제로부터 북한을 “막아내고”, “지켰다”고 주장]
북한의 남침 사실은 유엔과 서방세계뿐 아니라 1990년대 냉전 종식으로 옛 소련이 붕괴되면서 나온 많은 외교문서와 비밀 자료들에 나와 있다.
특히 1천 200쪽에 달하는 러시아 대통령실 소장 문서,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이 1994년 크렘린궁을 방문한 김영삼 한국 대통령에게 제공한 300여 종에 달하는 한국전쟁 문서에는 준비 일정까지 자세히 담겨 있다.
자료들에 따르면, 김일성은 옛 소련에 48번이나 남침 승인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하지 못하게 한다는 전제 아래 결국 이를 승인하고 중국의 마오쩌둥도 침략에 동의했다.
소련의 대대적인 무기 지원과 소련 군사 고문관들이 세운 작전계획에 따라 북한군이 기습 남침한 내용이 기밀 해제 문서들에 고스란히 명시돼 있다.
냉전 직후 모스크바에서 한국전쟁 등의 역사 자료를 수집· 분석해 북한의 남침 사실을 증명한 캐스린 웨더스비 아메리칸대 교수는 김일성이 전쟁 개시자로 소련에 승인을 압박했고, 침공을 궁극적으로 결정한 당사자가 스탈린이었다는 사실은 옛 소련 문서들에 일관적으로 나타난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일중 학자 21명도 지난 2012년 공동 집필한 책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에서 “한국전쟁은 소련 붕괴 이후 옛 소련 외교문서가 공개되면서 남침이 확실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결론 내린 바 있습니다.
[김정은: “맨손으로도 총포탄을 만들어내는 자력갱생의 혁명정신”, “전쟁은 넘볼 수 있는 상대와만 할 수 있는 무력충돌”이라며 과거 미제로부터 침략을 당했지만 “이제는 (자위적 핵 억제력으로) 그 누구도 우리를 넘보지 못한다”]
유엔과 옛 소련 문서들에 따르면, 북한은 전쟁 당시 대부분의 주요 무기를 스스로 생산할 능력이 없어 소련의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러시아 출신으로 북한 김일성종합대에서 공부했던 안드레이 란코프 한국 국민대 교수는 과거 옛 소련 자료들을 분석하고 증인들을 면담한 결과 북한이 당시 만들 수 있는 무기는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다 거짓말이다. 북한은 기관총을 만들지 못했다. 비행기, 탱크, 대포를 어떻게 보유할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은 다 소련에서 받았다. 다 소련제다.”
아울러 북한은 당시 소련이 지원한 최신 무기로 한국보다 훨씬 강력한 군사력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실제 전쟁으로 넘볼 수 있는 상대는 김 위원장의 말처럼 북한이 아니라 전투기와 탱크조차 전무했던 한국이었다.
한국 국방부의 2018 국방백서도 당시 남북 군사력을 자세히 비교한다. 6·25 전쟁 당시 북한은 모든 전력에서 한국을 크게 압도했다는 것.
전차(탱크)는 북한이 242대였지만 한국은 전무했고, 북한은 전투기와 전폭기가 211대였지만, 한국은 연습용 경비행기 22대가 전부였습니다. 박격포도 북한은 1천 728문으로 한국(960문)보다 두 배가 많았고, 대전차포와 곡사포도 각각 550문과 552문으로 한국보다 5~6배가 많았습니다.
미 중앙정보국(CIA)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트루먼 행정부는 애치슨 라인 등을 통해 한국을 외교적으로 우선순위에 두지 않았다. 1949년 6월에 주한 미군 철수를 완료한 뒤 수백 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긴 채 한국에 탱크와 전투기 등 주요 무기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CIA보고서] The last US Army forces left South Korea on 29 June 1949. A small Korean Military Assistance and Advisory Group (KMAAG) of several hundred men replaced the former military force, but it denied the fledgling ROK heavy equipment, tanks, anti-tank weapons, and aircraft. In the north, however, the USSR provided the North Korean People’s Army with large amounts of armor, artillery, aircraft, and other military equipment as well as training.
미국은 당시 한국에 중화력 무기들을 제공할 경우 이승만 대통령이 북침을 강행해 전쟁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김일성은 모두 무력을 통해 통일을 원했지만, 북한은 소련의 지원으로 능력이 있던 반면, 한국은 미국의 지원이 없어 능력이 없었던 것.
아울러 한국의 지상군 병력은 당시 9만 6천 명으로 19만여 명인 북한의 절반에 불과. 그나마 한국군의 절반은 후방 공산 세력 토벌에 투입돼 기습 남침을 막을 여력이 없었다.
한국전쟁사 전문가인 한국군사문제연구원의 허남성 석좌연구위원은 이 단체가 제작한 ‘6·25 전쟁의 개관’ 동영상에서 이런 군사적 열세 때문에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빠르게 진격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훈련조차도 우리 국군은 당시 중대급 훈련밖에는 못 했습니다만 북한은 이미 사단급 훈련까지 다 마친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일방적으로 내려 몰렸지만, 비교적 성공적 지연 작전을 하면서 대략 7월 말쯤에는 낙동강 전선이 형성되고 그곳에서 약 한 달 반 정도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습니다.”
[김정은: “총이 부족해 남해를 지척에 둔 낙동강가에 전우들을 묻고 피눈물을 삼키며 돌아서야 했던 동지들의 한을 잊은적이 없습니다.”]
북한이 낙동강 전투에서 완패한 채 후퇴한 것은 유엔군의 참전과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의 보급로가 차단됐기 때문이다.
기밀 해제된 미 CIA와 소련 문서들에 따르면, 당시 유엔군은 경부선 철도와 도로를 파괴해 북한의 무기 보급로를 차단했다. 조금만 더 전진하면 전승할 수 있다고 믿은 북한은 낙동강 전투에 대부분의 병력을 투입했기에 이런 보급로 차단에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즉 총이 부족해 피눈물을 삼키며 돌아서야 했다는 김 위원장의 말은 전반적인 전쟁 상황과 맥락을 설명하지 않은 채 일부만 지적한 부분적 팩트다.
[김정은: 한국전쟁 결과에 대해 “역사의 퇴물인 자본주의에 대한 인류의 미래인 사회주의의 승리였습니다”]
공산주의 국가는 이제 지구상에 북한과 쿠바밖에 없다. 중국과 베트남 등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수용해 개혁·개방을 했다. 그러나 북한은 체제를 고수해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유엔과 세계은행, 한국 통계청에 따르면 남북한의 경제력은 2018년 GDP(국내총생산) 기준 53배, 무역액은 북한의 400배, 기대수명은 한국인이 북한인보다 13살을 더 살 정도로 국력과 삶의 수준 모두 비교 자체가 의미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6·25전쟁 70주년 기념사에서 남북한 체제 경쟁이 이미 끝났다고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다만 전세를 뒤바꿀 수 있는 ‘게임체인저’로 불리는 북한의 핵무기가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체제 전환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게 많은 미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란코프 교수는 전 세계가 인정하는 이런 전쟁 역사와 국제 현실을 북한 지도자와 수뇌부가 70년째 왜곡하는 배경에 대해 3가지 이유를 지적한다.
1.북한 정권은 항상 미제와 남조선 괴뢰가 전쟁을 통해 멸공통일을 꿈꾼다고 세뇌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침략을 막아낸 평화의 주체라고 선전한다. 그런데 침략을 인정하면 이런 정체성에 큰 타격을 받는다.
2. 북한이 남한 침략을 인정하는 것은 사실상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가 파렴치한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김일성이 누구인가? 사람보다 높은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어떻게 신이 거짓말을 할 수 있나? (그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거다
3. 북한 수뇌부는 한국전쟁 정전일을 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일로 선전한다. 그런데 실상은 한국을 침공해 낙동강까지 갔지만, 참혹한 패배와 수많은 인명피해까지 초래한 ‘실패자’란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까? 북한 정권은 앞으로도 전쟁의 팩트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2012년 12월 17일 서울 성신여대 연구실에서 “6·25전쟁은 스탈린의 철저한 국제 정세 계산하에 감행된 전쟁”이라고 말하고 있는 캐스린 웨더스비 교수
웨더스비 교수는 북한 당국이 이런 왜곡된 사실을 계속 주민들에게 교육하고 선전하는 것이 남북관계 개선에도 계속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전문가들은 북한 수뇌부가 이런 왜곡된 역사로 주민들에게 미국과 한국에 대한 증오를 계속 심으면서 평화협정으로 가기는 힘들다며, 북한 주민들이 먼저 역사를 바로 아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대형 풍선을 통해 전단을 북한에 보내는 이민복 대북풍선단장은 이 때문에 6·25전쟁의 진실을 항상 1순위로 전단에 넣어 15년 이상 보내왔다. 그런데 지금은 그 소식을 북한에 보낼 수 없다.
한국 정부가 김여정의 협박 뒤 접경 지역 주민들의 안전을 이유로 이를 강하게 막으며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국 정부가 다른 방법을 통해 바른 전쟁 역사를 북한에 보내는 것도 아니란 지적.
거짓으로 인한 원한과 증오 속에 평화가 도래할 수 있을까?
갑자기 북한 당국의 ‘트위터’ 계정 소개 문구가 떠올랐다.
Anti-war, peace advocate and unbiased news on the DPRK through exclusive video and photos.- 전쟁 반대, 평화 옹호자, 독점(전용) 영상과 사진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편견 없는 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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