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집권 86세대’는 어떻게 형성되었나
시민단체와 ‘폴리페서’를 동원한 ‘집권 86세대’가 문재인 정부의 반경제학, 비현실적 민족주의, 반보수 포퓰리즘의 원인이라면, ‘집권 86세대’는 왜 그런 특징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를 유추해보기 위해 1980년대 학생운동과 1990~2000년대 민주당 입당 과정, 노무현 정권의 실패와 폐족화, 이후 복귀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자.
1) 반경제학과 민족주의의 근원: 1980년대 학생운동의 자주노선
1980년대 학생운동은 1960-70년대 학생운동의 반독재민주화운동, 노동자농민의 생존권 투쟁에 대한 연대를 계승하며 발전하는 동시에 이념적으로는 급진화되었다. 학생운동 논쟁, 사회성격논쟁을 거치며 혁명의 전망을 제출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한국 사회성격과 당면 혁명의 성격을 둘러싼 NL-PD논쟁은 이념적 급진화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성격논쟁은 1980년대 중반에 학계에서 시작되어, 1980년대 후반 1990년대에는 학생운동 공간에서도 논쟁이 된다.
또한 학생운동의 규모와 사회적 영향력도 극대화된다. 그 정점은 1987년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의 출범에서부터 1991년 5월 분신정국까지로 볼 수 있다.
전대협은 1992년 6기를 끝으로 1993년부터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으로 전환한다.
보수진영의 악의적인 왜곡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1980년대 학생운동이 급진화되고,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자생적인 주체사상파(주사파)가 형성되고 이것이 강력한 영향을 미친 역사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1980년 광주항쟁의 비극을 반추하며 대중적인 반미정서가 형성되고, 이런 배경에서 1985-86년경 자생적 주사파가 형성된다.
‘강철서신’의 선풍적 인기가 이를 상징한다. 물론 비주사NL로 불리는 경향이 1985년 이전부터 존재했고, 그 이후에도 전대협-한총련 초기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체사상이나 수령론에 대해 의문을 가질 뿐 학생운동의 진로와 관련해서는 대체로 같은 노선으로 일관했다. (1980년대 학생운동의 흐름과 쟁점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리는 보론을 참조하라.)
1986-1987년을 경과하면서 NL그룹은 학생운동의 다수파가 된다. 이 과정에서 NL그룹은 야당(신민당)과 재야(민통협 등)의 ‘직선제 개헌론’을 적극 수용한다.
주체사상의 ‘대중노선’에 대한 강조와 반미구국통일전선론에 따라 소부르주아는 물론 민족부르주아지와도 전략적 차원에서 연합할 수 있다는 논리(민주대연합론)가 영향을 미쳤다.
혁명의 주력은 북한(‘민주기지’)이며 남한의 운동은 ‘민주적 자주정부’를 수립해 북한과 통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선통일후변혁론’도 같은 맥락에 있다.
NL그룹은 서대협(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을 조직해 1987년 6월 항쟁에 적극 참여했고, 대선국면에서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지지(비지) 입장에 선다. 그리고 1988년 전대협을 통해 ‘반미조국통일투쟁’을 추진한다.
그러나 PD그룹은 이러한 통일투쟁이 한창 성장하고 있는 노동조합의 투쟁과 같은 당면 계급투쟁을 방기하는 ‘소부르주아성’을 지니고, 김대중(평민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PD그룹은 선변혁후통일론, 남한 혁명의 독자성을 바탕으로 민중운동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독자후보론, 독후)를 모색했다.
(이인영 전대협 1기의장/ 현 더불어 민주당 원내총무)
전대협의 통일운동은 민족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필요성을 대중적으로 상기시켰으나, 오히려 당시 노동자운동에 역효과를 미쳤다. 또한 구체적인 현실과 맞지 않는 투쟁 슬로건이 제출되고, 대중으로부터 외면받으며 1990년대 한총련의 학생운동은 빠르게 쇠퇴했다.
한국 사회의 구체적 현실과 동떨어진 정세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1990년대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북한 사회의 변화에도 둔감했기 때문이다.
이런 평가는 NL그룹 내부에서도 나왔다. 예를 들어 범민련 전 사무처장 민경우는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전대협의 통일운동은 정세와 어울리지 않았고, 1991년부터 95년까지 매년 정권과 격렬히 충돌했으나, 의미있는 사회적 변화를 만들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더 큰 문제는 면밀한 평가와 사색이 없이 경직적인 강박관념에 묶여 정권 탄압에 즉자적으로 대응하면서 학생사회에서 영향력을 상실했다고 지적한다.
‘집권 86세대’는 전대협 운동을 지도하면서 얻게 된 대중적 명망과 조직적 자산을 바탕으로 정치권에 쉽게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자신들이 주도했던 전대협 운동의 몰정세성에 대한 역사적 반성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집권 86세대는 반성은커녕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운동경력을 신화화했다. 자신들의 학생운동을 ‘민주화 운동’이라는 국가기구를 통해 박제화된 담론으로 수렴한다.
이를 통해 자신들의 경력을 일종의 비판할 수 없는 ‘성역’으로 만들어, 공직 출마와 집권을 정당화했다.
그 결과, 집권 86세대는 문재인 정권에서도 몰정세적 오류를 반복했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세계경제의 장기침체라는 현 정세에 적합하지 않은 담론이라도 가져다 쓴다.
바로 소득주도성장론이다. 또한 증세논의나 연금개혁과 같은 현 상황에 꼭 필요한 논의일지라도 결정을 회피한다.
북미협상에 대한 지나친 낙관처럼, 객관적인 국제정세를 주관적 희망을 투사해서 왜곡한다. 또한 궁지에 몰리면 이너서클과 핵심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반외세’ 민족주의 선동을 활용한다. 이 역시 국제적 분업구조에 기반한 글로벌 가치사슬과 금융세계화라는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2) 집권 86세대의 정계 진출 과정
집권 86세대들은 1990년대 여러 경로로 민주당에 입당하거나 공직선거에 출마한다.
첫째, 사회단체, 청년단체 활동을 하다 바로 정치권으로 영입되는 경로가 있다. 둘째, 참여연대, 민변 등 1990년대 새로운 시민운동 활동을 거쳐 영입되는 경우다. 셋째, 학생운동을 일정하게 정리하고 교수, 변호사 등 전문직이 되어 명망을 쌓거나, 사업가로 성공한 뒤 정치에 입문하는 경우다.
둘째, 셋째 경로는 국회의원이나 공직 임명의 시기가 조금 더 늦는 경우가 많다.
여러 방면에 골고루 분산되어 네트워크를 형성한 뒤, 서로 밀고 당겨주면서 민주당과 정권의 요직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공천에 탈락하거나 선거에 패배하거나, 위법행위를 저지르며 권력 핵심에서 멀어진 경우도 많다.
첫 번째 경로의 대표적 사례는 이른바 ‘전대협 4인방’(이인영, 우상호, 오영식, 임종석)이다.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 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과반의석 확보가 어렵다고 판단해 ‘새천년민주당’이란 신당을 창당한다.
한국 정당사에서 단순히 권력기반 강화를 목적으로 대통령에 의해 창당된 여섯 번째 집권당이자, 김대중이 주도해서 만든 여섯 번째 정당이기도 했다.
대중적 명망이 있던 ‘전대협 4인방’은 김대중의 ‘젊은 피 수혈론’에 의해 영입된다. 임종석과 오영식은 16대, 우상호와 이인영은 17대부터 당선되기 시작해 현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장, 원내대표, 철도공사사장을 역임한다.
이들처럼 바로 국회의원 공천을 받지 못한 다수 정치인들은 국회의원 보좌관이나 민주당 당직자, 지역활동 등을 거쳐 2004년 탄핵촛불과 열린우리당 창당 바람을 타고 대거 국회로 입성한다.
조정식, 안민석 의원의 경우 2004년 이후 같은 지역에서 내리 4선을 한다. ‘잘 안 풀리는 경우’에는 기초지자체장, 기초의회로 진출하기도 한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경로는 정청래, 정봉주처럼 학원사업을 해 돈을 번 뒤 17대 총선에서 들어온 경우도 있으나, 참여연대, 민변, 여연 등에서 활동하다가 19대 총선에 들어온 경우가 더 전형적이다.
노무현 정권의 실패로 인한 2008년 총선 대패 이후, 2011년 ‘안철수 현상’(안철수의 양보로 무소속 박원순의 서울시장 당선)과 계파 간 갈등 속에서 위기를 겪던 민주당이 노동계와 시민단체를 포함하는 야당 통합을 추진(민주통합당)하는 과정에서 영입된다.
민주당 외곽에 있다가 19대 총선에서 당선된 대표적 사례는 85학번 구학련(NL)출신으로 참여연대 정책실장, 사무처장을 역임한 김기식이나 82학번 사노맹(CA)출신으로 한국노동연구원에서 근무했던 은수미다.
김기식은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서 조국, 남윤인순 등과 ‘야권 통합’을 촉구하는 시민사회진영을 규합했다. 이후 남윤인순과 함께 19대 국회에 들어간다.
김기식은 문재인 정부에서 금감원장에 임명되었지만 로비 외유 논란과 거짓 해명으로 ‘내로남불’이 되며 조기 낙마했다. 은수미는 이재명을 이어 성남시장이 되었는데 현재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2심에서 당선무효형을 받은 상태다.
‘집권 86세대’는 정계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학생운동 당시에 내세웠던 이념이나 급진적 요구를 삭제해갔다. 실제 1990년대는 전향의 시대였다.
우선 86세대의 선배세대라고 할 수 있는 민중당 김문수, 이재오, 이우재 등이 1992년 총선 패배 이후 1996년 총선에서 신한국당에 입당한다.
NL쪽에서는 민혁당 핵심인 김영환과 홍진표가 1998년 『시대정신』을 창간하며 뉴라이트의 싹을 틔웠다.
이들이 명백한 보수주의로 전향한다면, 민주당의 ‘집권 86세대’는 주체사상이라는 극단화된 스탈린주의에서 모호한 ‘진보주의’로 전향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반미민족주의나 김대중(평민당)에 대한 지지로 일관했다는 점에서는 전향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80년대에 비해 이념과 정세인식이 사라진 것은 분명하다. 임종석과 우상호는 1994년에 청년정보문화센터라는 청년단체를 조직한다.
그러나 청년정보문화센터는 한청협(민청련의 후신) 같은 80년대 청년운동이 정체된 이유는 이념에 매달렸기 때문이라고 평가하며, 이념색의 탈각과 다양성, 수평적 연대를 강조한다.
PC통신을 적극 활용하며 영화, 노래 등 관심사별 소모임에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조직을 확대한다.
386들의 ‘네트워크’ 붐은 90년대 들어 200-300개의 조직이 생길 정도였는데, 이에 대해 정계 진출위한 발판 만들기, 몸값 불리기라는 해석도 공존했다.
3) 반보수 포퓰리즘과 ‘주류교체론’
집권 86세대는 일관된 이념의 부재 속에서도 강한 유대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은 광주항쟁과 87년 6월 항쟁이라는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집단적 정서를 공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류교체론’이라는 세대론을 내세워 세대적 동질감과 구심력을 형성했다.
‘주류교체론’은 2001년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발언에서 시작되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합리적인 메인스트림들이 2002년 선거에서 새로운 판단을 해줄 것으로 믿는다.”) 메인스트림, 즉 주류는 무엇이냐는 논의가 촉발된 것이다.
이회창을 꺾고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은 비주류에서 새로운 주류로 전환하는 상징이 되었다.
2002년에 발표된 홍덕률 교수의 논문(『한국의 메인스트림은 누구인가』)은 집권 86세대가 지금도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담론모형을 전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논문은 주류를 “사회적, 이념적 지도자집단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 그들의 가치관과 이념, 문화”로 정의한다.
비주류는 여기에서 소외되거나 주류에 도전한다. 홍덕률은 멀게는 1987년부터 가깝게는 1998년 정권교체 이후 구주류와 새로운 주류 간 세력교체가 진행 중이라고 주장한다.
구주류는 TK(대구경북), KS(경기고-서울대)출신들이고 경제에서는 재벌, 문화에서는 언론자본이다. 이들은 추종자들을 지연, 학연 등의 연고와 이권 배분을 통해 동원한다.
구주류의 양대 이념은 ‘발전주의’, ‘반공반북주의’이고, 정적들을 억압하는 ‘권위주의’가 파생한다.
이들은 일제, 미군정, 이승만, 군부에 의해 위로부터 형성되었다. 친일, 인권유린 경력으로 역사적 정통성 상실했으나 언론, 학교, 복지재단 등을 소유해서 시민적 리더십의 공백을 대체한다.
반면 새로운 주류는 크게 두 집단으로, 하나는 학생운동세대다. 4.19부터 386까지 모두 언급한다. 다른 하나는 “노동자 및 화이트칼라”다. 조직된 생산직, 사무직 노동자로 보인다.
신주류의 특징은 ‘시민적 리더십’ (노사모 등 직접참여), ‘민주주의 확대와 심화’(소액주주, 지방자치, 성평등)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합리적이며, 반부패, 탈냉전과 통일지향, 생태와 복지지향을 가지고 있다.
가히 노무현과 86세대에 대한 ‘용비어천가’라 할 수 있는 이 논문은 주류교체의 완성을 요청한다.
노무현 당선 이후 극심한 사회갈등은 정치적 주류 교체에도 불구하고 경제, 사회적 주류가 온존했기 때문이며, 혼란의 해법은 신주류가 경제, 사회 영역에서도 주류가 되는 것이다. 그 관건은 도덕성과 시민적 리더십의 확보에 달렸다고 전망한다.
홍 교수의 2003년 논문(「한국사회의 세대 연구」)은 이러한 주장을 세대론으로 가공한다. 산업화세대에 맞서 민주화세대와 정보화세대가 노무현을 만들었으나, 이는 단순한 세대교체가 아니라 ‘반공규율사회’ 이데올로기가 해체되고 기득권집단이 교체되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2002~2003년 홍덕률 교수의 세대교체론은 사실 이미 1990년대에 86세대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서울대 83학번 자민투 출신으로 현재 알라딘 서점 사장인 조유식 씨는 《월간 말》 기자 시절 ‘30대 차세대 대망론’을 보도한다.
30대가 된 86세대들이 ‘희생만 치른 채 60,70년대 학번과 90년대 학번 사이를 부유’한다는 ‘세대적 위기감’ 겪고 있다.
그러나 민주의식, 민족의식이 남달리 발달하고 세계화 정보화의 조류를 타는 첫 세대로서 ‘30대 역할론’은 충분히 근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세대와 연대도 필요한데, “40대는 양김에 억눌리지 않고 이성계 역할, 30대는 정도전 역할”을 해야한다는 이광재 씨의 주장을 인용한다. 실제로 이광재는 안희정과 함께 자신이 보좌한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며, 노무현정권의 실세(‘좌희정 우광재’)가 되었다.
그러나 홍덕률 교수와 조유식 씨의 전망은 주관적 희망에 불과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노무현 정부는 (신주류라 분류되었던) 노동자운동의 거센 저항을 받았고, 경제민주화로 포장된 소액주주운동은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소유권을 강화하는 영미식 신자유주의 논리였다.
방폐장 선정 문제, 골프장 대량 허가, 천성산 터널 반대, 의료민영화 등 생태와 복지에서도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노무현의 ‘좌파 신자유주의’는 핵심 지지층을 분열시켰다. 정권 말에는 이전 정권과 다름없이 대통령 친인척 및 핵심 인사들의 부정부패 사건이 터지고, 임기가 끝난 뒤에는 스스로 ‘친노는 폐족’이라고 선언할 정도로 완전히 고립된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노무현 정권이 실패했음에도, 집권 86세대는 반MB투쟁과 박근혜 퇴진 촛불을 거쳐 문재인 정권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친노’는 ‘친문’이 되었고, ‘노사모’는 ‘달빛기사단’이 되었다.
4) 반보수 포퓰리즘의 심화, ‘조국사태’
집권 86세대가 다시 집권한 비결은 ‘주류교체론’으로 상징되는 반보수 포퓰리즘을 ‘원한과 복수의 정치’로 더욱 심화시키는 것이었다.
반경제학과 비현실적 민족주의가 집권 86세대의 일관적인 특성이라면, 반보수 포퓰리즘은 이들이 정치에 진출해 권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점점 더 심화된 특성이다.
세계 경제의 객관적 정세에 대한 성찰과 구체적인 한국 사회 개혁 대안이 없기에, ‘86세대의 특징’인 ‘도덕성’과 ‘시민적 리더십’에 더 기대는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과 박근혜의 각종 비리를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하며, 이 과정에서 인격적 비난이나 음모론도 서슴지 않는 것을 ‘도덕성’라 부를 순 없다.
또한 네이버, 다음 뉴스를 댓글부대로 장악하고, SNS를 가짜 뉴스로 도배하고, 문재인을 비판하는 정치인들을 집단 린치하는 것을 ‘시민적 리더십’이라 부를 순 없다.
집권 86세대의 행태는 한국적 포퓰리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군사독재라는 직관적 ‘거악’이 사라지고,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때, 경제적으로는 외환위기 이후 지속되는 장기불황 속에서 구조적 대안을 고민해야 할 때, 노무현을 선택했다.
노무현은 재벌과 기재부 관료들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일부 수행했으나, 계급적 지지기반이 더욱 취약해지면서 신자유주의 개혁도 실패했다.
집권 86세대는 지지층을 동원하기 위해, 반대세력을 수구보수(기득권)로 정의해 주류-비주류라는 한국 사회에 새로운 균열을 발생시킨다. 지식인(엘리트)에 적대하는 대중이라는 표상을 형성한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객관적으로 성찰하기보다 반대세력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을 다졌다.
집권 86세대와 문재인 지지자들은 반보수 반기득권 포퓰리즘을 더욱 심화시켰다. 정권을 비판하는 자들에겐 기득권이라는 레테르를 붙인다. ‘토착왜구냐’, ‘조중동같다’, ‘군사독재 잔재’와 같은 식으로 과거사와 결합한다. 냉전 시절의 반공주의와 닮았다.
집권 86세대는 빨갱이, 주사파와 같은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냉전시대 이분법적 논리라고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에 대한 비판에 똑같이 이분법적 논리로 적대화한다.
최근의 검찰개혁과 조국사태는 반보수 포퓰리즘이 얼마나 심각해졌는지 극명히 보여주었다. 문재인 정권은 경제정책과 대북정책이 궁지에 몰리자, 검찰개혁에 몰두한다.
정권이 끝난 뒤 수사받고 구속되지 않으려면, 나아가 정권을 재창출하려면, 엘리트 기득권에 일정 양보했던 노무현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한치의 타협도 하지 않겠다는 식이다.
제1야당을 배제하고 패스트트랙을 추진하더니 추미애 법무부장관은 청와대를 수사하는 검찰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한다.
‘조국사태’와 연이은 청와대의 선거개입 의혹에도 문재인 정권은 책임있는 해명은커녕, 최소한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는 수준의 사과도 없다.
오히려 “정치적 의도가 의심된다”(하명수사 개입 의혹에 대한 백원우 전 민정비서관의 입장문)는 둥 적반하장의 태도로 일관한다. ‘신주류’ 집권 86세대가 권력에 몰두하고, 진영논리에 갇힐수록, 공동체의 보편적인 가치와 원칙은 사라지고 있다.
집권 86세대의 형성과정과 특성을 정리해보자. 집권 86세대는 학생운동 시절, 북한이나 소련을 보며 사회주의적 대안을 모색했으나, 시대의 변화를 성찰하지 못하고 경직되었으며, 이념을 쇄신하지 못했다.
이들은 이념을 버리고 김대중과 재야를 계승하는 친노-친문 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만든 노무현과 문재인 정권은 이명박, 박근혜라는 한국적 보수주의와 대결하면서 한국적 포퓰리즘을 강화했다.
그 특징은 반경제학과 비현실적 민족주의, 반보수 포퓰리즘이다. 그리고 집권 86세대가 정치적 정점에 이른 문재인 정부에서 그 특징은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part 5에서 마지막으로 이어집니다)
kim09
Latest posts by kim09 (see all)
- 李東馥 컬럼 “朴元淳 • 白善燁 두 사람의 葬禮를 둘러싼 대한민국의 瑤池鏡” - 7월 11, 2020
- 미주국군포로송환위원회 회장 정용봉 “국군포로는 고향에 돌아와야 합니다” - 6월 12, 2020
- 70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못한 자들 “국군 포로” - 6월 12, 2020
https://buypriligyhop.com/ – Priligy
Where To Order Generic Cheapeast Amoxicilina In Australia
Priligy
http://buyplaquenilcv.com/ – covid 19 plaquenil
https://buylasixshop.com/ – what does furosemide do
https://buyzithromaxinf.com/ – Zithromax
how long does it take for gabapentin to work
http://buyneurontine.com/ – gabapentin benefits
http://prednisonebuyon.com/ – Prednis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