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역병은 주변부 인간들에 대한 박해로 이어졌다. 유럽의 중세 후기 페스트는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졌다.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푼다는 이야기를 퍼뜨리며 유대인들을 마구 잡아 죽였다.
미국의 리버럴들이 트럼프를 공격하는 무기로 삼는다. 예를 들어 마이클 샌달은 트럼프가 경제 침체에 대한 조바심에서, 바이러스에 승리했다고 선언하며 사람들을 일찌감치 직장에 복귀시킨다면, 그것은 경제를 살리고 주식시장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그냥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메르스 사태 때 박원순 서울 시장이 한 밤 중에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한 의사에 대한 사생활 정보를 마구 밝혔던 사례를 우리는 기억한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는 더욱 가관이었다. 이재명 경기 지사가 지난 8월 소속 공무원과 소방관, 경찰관 등 20명을 대동한 채 밤 8시 40분쯤 가평 신천지 연수원에 가서, 교회측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강제로 진입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보수 집회 참석자들에게 “전원 고발과 구상권 행사도 불사할 것”임을 강력히 경고했다.
추미애 법무장관은 “당국의 방역활동을 저해하는 일체의 행위에 대해 임의수사와 강제수사 등 법이 허용하는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엄정하게 조치하겠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감염병에 대한 방역은 개인의 인권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국민공동체의 생명과 안전에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필요한 경우에는 체포라든지, 구속영장 청구라든지 엄정한 법집행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역사적으로 팬데믹은 권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권력이론과 특히 밀접한 관련이 있는 두 전염병은 나병과 페스트다. 나병은 중세 내내 창궐하다가 14세기말에 사라졌다. 페스트는 중세말(14세기)에 발생하여 17세기 후반기까지 창궐하였다.
18세기에 들어와 권력 형태는 페스트의 모델(더 정확히 말하면 페스트에 대처하던 방식의 모델)을 채택했다. 이때부터 근대가 시작되었다. 푸코가 말하는 규율권력, 미시권력, 앎-권력, 생체권력이 모두 여기서 파생된 것이다.
나병의 모델은 타자를 추방하고 배제하고 내치는 방식이며, 페스트의 모델은 타자를 끌어안고, 포용하고, 함께 살며 관찰하고 거기서 지식을 생산하는 방식이다. 근대 이후 현대의 권력 테크닉이 바로 이것이다.
중세 말 흑사병이 대대적으로 유행하면서 유럽 인구 2천 5백만 명이 희생되는 펜데믹 현상이 일어났다. 피부가 까맣게 변하며 죽는 페스트는 극도로 공포스러운 병이었다. 페스트에 걸린 사람들은 온갖 체면을 포기하고, 이때까지 쓰고 있던 도덕의 가면을 집어 던진 채 무질서한 방탕에 몸을 내맡겼다.
현대의 카니발 축제에서 해골 옷을 입고 춤추는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는 베니스의 페스트 시기 때 시작된 것이다. 페스트가 창궐하는 도시에서 모든 사람들은 완전한 자유를 폭발적으로 누렸다. 통음난무(痛飮亂舞)가 횡행하고, 법이 완전히 무시되었다.
도시 전체의 규칙이 무너지고 완전히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페스트는 인간의 육체를 유린하는 동시에 법을 유린하면서, 공포와 함께 짜릿한 해방감을 모든 사람들에게 안겨 주었다.
이 무질서를 바로 잡고 전염병과 싸우기 위해 정부는 철저한 주민 분할지배 방식을 고안했다. 페스트가 발생한 지역을 바둑판처럼 나누고, 사람들에게 언제 집에서 나갈 지, 시간 별로 집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할 지, 어떤 접촉을 피해야 할지를 정해주었다. 검사관에게 문을 열어 주어 검사를 받을 것도 강제했다. 그리고 그것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기록했다.
환자들에게는 불행이었지만 권력자들에게는 권력이 완벽하게 행사되는 멋진 순간이었다. 모든 국민의 행동을 세밀하게 감시하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모든 권력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기 때문이다.
17~18세기 초부터 정치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권력 모델이 바로 이 페스트의 모델이다. 이 감시 체제야말로 18세기 입헌군주 시대의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푸코는 말한다.
<나병의 모델과 페스트 모델의 차이점>
역사 속에서 나병과 페스트는 가장 핵심적인 권력 모델이다. 우선 나병의 모델을 살펴보자. 중세 때까지 나환자들은 성벽 밖이나 도시의 경계 밖 먼 곳으로 추방되었다. 영화 ‘벤허’에서 동굴의 나환자촌에 예수의 뒷모습이 등장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라.
나환자들을 주변부로 밀어내는 관행은 단순한 공간적 거리 두기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사회에서 추방되고, 배제되고, 자격이 박탈되었다. 떠날 때도 마치 장례식을 치르듯 관 속에 누워 신부가 집전하는 장례 미사를 치른 후 길을 떠났다. 그는 현실 세계에서 완전히 죽은 사람이었다. 가혹한 분할이며 거리 두기였다.
당시 권력이 행해지는 방식이 이러했다. 나환자냐 아니냐의 이진법(二進法)적 권력이었다. 나환자면 쫓아내고, 나환자가 아니면 포용하여 함께 살았다. 소위 네거티브한 권력 테크닉이다. 거부하고, 추방하고, 내쫒고, 제외시키고, 금지하고, 주변부로 몰아내는 억압적 권력 기술이다.
나병의 모델이 그 사회의 타자를 추방하고 배제하고 내치는 네가티브한 권력이라면 페스트의 모델은 타자를 끌어안고 포용하여 거기서 지식을 이끌어내는 포지티브한 권력이다. 이 권력기술에서는 정보가, 앎이, 지식이 생산되었다.
정치학, 심리학, 정신분석학 등 모든 인문학과 의학 등의 인간과학이 모두 여기서 시작되었다. 뭔가 만들어내고 창조하고 생산하는 메커니즘, 억압이 아니라 생산하는 권력이라는 의미에서 이것은 포지티브한 권력이다. 여기서는 규율이 가장 중요하다.
페스트의 모델은 규율권력을 만들어냈다. 규율권력에서는 감시가 가장 중요한 요소다. 사람들이 엄격한 규칙에 복종하지 않으면 페스트의 관리는 불가능하다. 규율을 부과하려면 누가 말을 잘 듣고 누가 잘 듣지 않는지 감시해야만 한다. 감시하려면 상대방이 나를 볼 수 없으면서 나는 상대방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소위 시선의 비대칭성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판옵틱의 방식이다. 판옵틱이란 감시자가 한 지점에서 다수의 타자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건축적 장치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말한 영국의 정치 사상가 제레미 벤담이 설계한 감옥의 이름이다.
감시하기 위해서는 가시성이 중요하다. 누군가를 감시하려면 우선 그를 보아야 한다. 학교, 병영, 작업장, 병원 등 모든 공공건물에서 새로운 건축 설계가 시도되었다.
사물과 장소를 감시에 적합하게 배치했으며, 기숙사의 공동 침실을 조정하는 등 세심하게 가시성의 공간을 확보했다. 화장실의 형태와 배치, 문의 높낮이 등을 신경 썼고, 으슥한 구석을 퇴치했다. 모두 가시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다. 개인들을 완벽하게 감시하고, 어느 순간, 어떤 행동을 하든 모든 사람들이 권력의 눈앞에 나타나도록 하는 기술이다.
이런 방식들은 사실 오래전부터 수도원, 군대, 혹은 작업장에 있었던 것들이다. 그러나 17~18세기를 거치면서 규율과 감시는 지배의 일반 양식이 되었다. 이와 같은 규율 권력은 신체의 소유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노예제와 다르고, 고비용의 폭력적 노예제를 탈피했다는 점에서 세련된 권력 기술이다.
지극히 근대적인 권력 장치이지만 또한 매우 고전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중심에 누군가의 눈이 있다는 것, 즉 감시의 시선이 있다는 것은 바로 군주와 신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내 신하 중 그 누구도 내 눈을 피할 수 없고, 내 신하의 그 어떤 몸짓도 내게 알려지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지점 한 가운데 있고 싶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군주의 완벽한 꿈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장애물 없이 대상을 완전히 투명하게 감시하고, 또 완벽하게 집행할 수 있도록 국민 모두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고 싶다는 욕망은 군주제에서 현대 전체주의 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권력자들의 로망이다. 18세기 또는 입헌군주 시대가 이 모델을 권력 기술로 채택했다. 페스트의 모델은 18세기의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푸코는 말한다.
결국 페스트의 모델은 모든 사람을 끌어안고, 관찰하며, 앎을 형성하고, 이 관찰과 앎에서부터 권력의 효과를 증식시키는 방식이다. 꼼꼼한 관찰을 통해 모든 것을 알고, 무언가 만들어내는 권력이다.
나병의 모델처럼 불분명하게 혼합된 두 개의 큰 덩어리로 사람들을 분리하는 게 아니라 차별화된 개인들을 분배 배치하는 권력이다. 무지하고 무식한 권력이 아니라 앎을 형성하고, 투입하고, 축적하고, 증식하는 메커니즘이다.
이것이 근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소위 관리(管理) 기술(art de gouverner)이다. 다수를 관리하고, 조직하고, 뿌리박고, 조정하고, 그들 사이에 위계를 정하는 기술이다.
<Part 2 미시 권력으로 역병>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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