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목사의‘기독교 건국론’의 핵심은 그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그 근원으로서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해방 공간에서 새로운 나라의 틀을 세울 수 있게 된 것이‘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틀은 바로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신의 섭리와 경륜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 모든 국민이 합심하여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가 가장 경계하는 건국 시나리오 중 기피대상 1호는 유물론적 공산 독재국가의 출현이었다.
한 목사는 새로운 국가의 모습은 어디까지나 자유가 중심되는 민주국가의 건설을 목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유가 언제나 보장될 수 있는 민주주의의 기본 요소는 ‘첫째로, 민주주의 근본 사상의 철저한 이해와 신념, 둘째로 질서와 법의 존중사상, 셋째로 자유를 바로 쓸 수 있는 국민의 도덕적 품격에서 찾을 수 있다’ 고 적시하며 건국의 초석이 중요한 만큼,
세워진 나라가 번영을 향하여 나아가고자 할 때 개개인이 꼭 갖추어야 하는 덕목도 강조됐다. 또 분단 현실의 극복을 위해 구체적인 행동강령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한 목사는 현실정치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기독인이 새 나라를 건설하는 주역이 되어야 하며, 그러한 가능성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 희망이요 기대라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내 보이고 있다.
▲한 목사의 ‘기독교 입국론’을 현실화한 이승만 건국대통령
“기독교는 국가적 견지에서 보면 애국 운동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3·1운동 당시의 기독교의 역할이 어떠하였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조국 부흥 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의 대다수가 기독교 신자였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도산 선생, 남강 선생을 비롯하여 지금 생존하여 지도하시는 이승만 박사, 김구 주석, 김규식 박사, 그 외에 국가를 위하여 순국한 허다한 애국지사의 수는 오직 하나님만 아실 것이다.”
한 목사는 내심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고, 우익을 대표하는 민족진영의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된 것을 매우 안도하였다. 더 이상 남한에서의 불확실성을 걷어내고 질서를 확립할 정부가 세워지는 일은 그의 평소 신념과 일치하였기 때문이다.
한 목사의‘기독교 입국론’은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이어 기독교인이며 투철한 반공주의자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으로 현실에서 어느 정도 실제적인 꽃을 피울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런가하면, 또한 실제로 제1공화국 시절 처음 열렸던 개원 국회는 당시 감리교 목사이기도 했던 이윤영 의원의 기도로 개회됐으며, 간접선거로 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취임식도 기독교적 예전으로 집례되었다.
이승만 정부 전반기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였던‘일민주의’사상은 기독교적 성격을 근간으로 했다.
다산문화예술진흥원 원장)이승만은 대통령이 되기 전과 후 ‘기독교를 나라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확신을 거듭 표명해 왔기에, 이 점에서 어쩌면 한 목사가 상상하던 일이 현실화된 것이다.
‘기독교 건국론’이 현실정치에서 가장 극적으로 구현된 셈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 군정기에 도입된 형목· 경목· 군목 제도, 성탄절 공휴일 제도 등을 그대로 유지했고, 주요 국가의례들이 기독교식으로 제정되거나 거행되도록 하였다.
이 같은 대한민국의 설립과 이어 등장했던 정부와 국회, 그리고 사법기관 등에서 지속적으로 기독교, 특히 개신교적 이념이 반영되는 현상은 다양한 방면에서 꾸준히 그 형태를 볼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땅을 합법적으로 구입해서 합법적으로 모든 국민들에게 가질 수 있게 하는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아이러니하게 양반들의 지지로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지주제도 없애는 농지개혁을 단행, 토지를 소작인에게 돌려주는 토지개혁을 통해 농민들이 자기 땅을 가지고 농사하는 기반을 만들어 6.25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자기 땅을 지키는 동력이 되었다.
한 목사는 기독교의 주도적 건국 참여와 함께, 기독교의 정치· 문화적 개화운동을 동시에 강조함으로써 해방 이전, 즉 한반도에서 기독교를 수용했던 복음 1세대가 가졌던 진보· 보수의 양대 과제를 동시에 종합적으로 수행하는 양상을 보여주며 새로운 대한민국의 출발에 기여했다.
한 목사에게 있어 민주주의라는 꽃은 반드시 기독교적 문화라는 밭에서만 아름답게 필 수 있다고 본 바, 당대의 선진 제국 곧 화란이나 미국 등이 바로 기독교 문화에서 꽃을 핀 민주주의 국가들이 예증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그의‘기독교 건국론’에서 민족의식과 신앙의 외연화는 해방과 건국에 있어 기독교적 민족의식의 표현이었다.
그의 영향력이 남한인구 1/4에 해당하는 개신교 주류 세력에 끼친 영향을 감안한다면, 당시 한국 기독교의 민족의식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한 목사의‘기독교 건국론’은 진보와 보수간 균형을 이루는 수용적 결과물이었다.
하지만‘기독교적 건국론’이 해방 당시에는 기독교인의 적극적 사회 대응이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보수화 경향을 띠고 기득권에 안주하게 되고,
특히 정부 수립 후 보국, 안보, 사회 안정 이라는 흐름에 따라가다 새로운 비전 제시가 이어지지 못하였다는 점은 참으로 아쉬운 점이다.
이러한 처음 행적은 시간이 갈수록 정치적 보수성으로 기울었고 특히 그의 투철한 반공사상과 사회안정 추구의 열망은 소극적 정치참여 형태로 나타났다.
한 목사의 좌절과 신앙의 외연 확대
한 목사 자신의 생애에서 평생의 과업으로 꿈꾸던‘기독교적 건국’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상황이 그리 오래가지 않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상황을 낳게 되었으니,
그것은 첫째로 6·25전쟁의 발발이요, 둘째로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로 부패 스캔들로 이어진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한 목사의‘기독교 건국론’이 당면한 시련은 이승만 정권의 실패와도 직결된다.
새로 건립된 국가에서 기독교 정신을 근간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법치, 그리고 질서에 대한 존중 등의 핵심 가치를 주장하였고, 그 가치를 공유하는 우익 진영의 민주인사, 특히 기독교 인사들의 정부 요직 참여를 반겼지만,
현실에서 정치권력이 강화되는 와중에 그에 기생하는 사이비 신자들이 횡행하고 또한 그로 인해 4.19혁명으로 정권 자체가 붕괴되는 엄청난 충격적 결과를 가져온 사실에 자못 큰 실망을 금치 못하였다.
한 목사의‘기독교 입국론’은 미처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깊은 병으로 상처를 입고 좌절해 버린 형국이 되었다. 이는 정교분리와 목회자적 정체성에 입각하여 복음화운동에 매진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한 목사의 ‘민족복음화’ 론은 한국민족에게 복음을 전해 기독교 정신을 확산하고 진흥시켜 건실한 민주주의 국가를 세워가고자 한 것인 동시에 교회부흥의 새 장을 열었다.
이후 한 목사는 70년대에 들어서며 주요 관심은 5천만명 영혼구원의 불길을 당긴 ‘민족복음화’와 희생과 섬김으로 이룬 ‘한국교회연합운동’, 더 나아가 민족 통일에 대한 아젠다(agenda)로 방향을 돌린다.
한 목사의 삶은 대한민국의 근대사만큼이나 희노애락으로 점철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저서「기독교와 건국론」을 통하여 한 목사의 신앙, 철학, 그리고 삶의 족적은 그의 주변인들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형성과 그 전개 과정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으로 남겨졌다는 점이다.
공산화를 막고 오늘의 자유대한민국 탄생과정에 있어서 한목사의 ‘기독교적 건국’ 이라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실천적 삶이라는 발자취 앞에 그것의 실천이라는 빚을 지고 있다.
지금 한국교회는 분열된 에큐메니컬(Ecumenical) 정신을 다시 회복해 새로운 연합운동을 전개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이효상 원장(시인, 수필가, 칼럼니스트, 다산문화예술진흥원 원장)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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