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만에 일본에 돌아와 김정은 정권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가와사키 에이코(76)씨는 ‘액션 포 코리아 유나이티드’ 대표로 북송사업과 조총련 문제를 집중 제기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1959년 일본 니가타항에서 재일동포를 태운 북송선이 출항하는 모습. 가와사키씨도 이듬해인 1960년 같은 배를 타고 북으로 향했다>
2008년 영국 출신의 역사학자 테사 모리스 스즈키 교수가 <북한행 엑소더스>라는 책을 내기 전까지 재일교포 북송 사건은 지역 내 영향력 확장을 노리는 조총련과 노동력 부족 현상을 해소하기 위한 북한 당국의 대남정책이 낳은 비극 정도로만 인식을 해왔다.
실제로 이 사건을 겉으로만 보면 북한 적십자, 일본 적십자와 그리고 둘을 중재했던 국제적십자 사이의 인도적 조치로만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본질을 모를 때 이야기이다.
10년 간의 집요한 기록 추적 끝에 테사 모리스 교수는 이 사건을 국제적십자 역사 상 가장 끔찍하고 비극적인 사건으로 결론을 내린다. 가장 중립적이고 인도적이어야 하는 국제적십사 활동이 가장 정치적인 논리에 의해서 움직였다는 결론이다.테사 모리스의 연구 결과는 1950년대 중반부터 진행되어 왔던 일본 정부의 은밀한 행보들을 밝혀 냈다는 점에서 놀랍다. 실제로 요시다 시게루와 기시 노부스케로 이어지는 ‘전후’ 일본 내각의 외교 엘리트들이 총 출동했다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다.
그렇다면 일본 정부는 왜 재일한인들을 북으로 보내는 작업에 동참했는가?
정확히 말하면 일본 정부는 단순 가담자가 아니라, ‘북송 사건’의 총괄 기획자이자 가장 큰 수혜자 중 하나였다.
이 연결 고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고도로 발달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인 일본에서 극도로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공산주의 북한 사회로 10만 명에 가까운 재일 한인들이 이동했다는 모순을 이해할 길은 없다.
개인적으로 2019년 경부터 북송 사건을 추적하면서 테사 모리스의 연구가 놀랍고 한편으로는 반가웠던 것은 새로운 사실에 대한 접근을 열어준 실마리를 발견했다는 느낌이들었기 때문이다.
‘북송 사건’은 위안부나 징용공 문제와는 분명히 결을 달리한다. 따라서 좌파 정부가 주동한 ‘반일 운동’과도 다르다.
일본과 한국이 동북아시아에서 공산주의와 전제주의의 위협으로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낼 수 있는 ‘가치 동맹’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공유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 중 하나다. 사건은 과거에 묶여 있지만, 미래로 열려 있는 창이다.
‘밤사이 개는 짖지 않았다. 그것은 참 기묘한 일이었다.’ (셜록 홈즈)
테사 모리스는 사건의 본질에 접근하면서 10만 명의 힘 없는 재일한인들에게 거짓과 사탕발림으로 북한으로 보내는 과정에서 드러난 ‘기묘한 침묵’에 대해서도 지적을 하고 있다. 여기서 침묵을 지켰던 개는 미국, 바로 ‘워싱턴의 침묵’이었다.
공교롭게도 영화 ‘하와이로 간 대통령’을 준비하며 자료를 찾던 중에 테사 모리스가 말한 ‘침묵’의 원인과 이유를 찾게 되었다.
<195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식>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부터 미국의 일관된 입장은 지역 안정을 위한 한일 관계 회복에 있었다. 문제는 비용의 최소화였다.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서면서 어떻게 하면 동북아에서 반공의 보루를 확보할 것인가.
그 결과 한국에 대한 2억 달러에 달하는 경제 원조를 일본 제품에 대한 수입으로 대체하려는 압력까지 존재했다. 일종의 일석이조 정책이다.
원조를 통해 한국의 경제를 안정시키고, 일본의 경제를 부흥시킨다. 문제는 반일주의자 이승만의 존재였다.
이승만 정부 입장에서는 일본의 배만 불려주는 친일 경제 정책에 반기를 들 수 밖에 없었다. 1950년대 중반 이후부터 등장하는 미 행정부와 이승만의 갈등은 대부분 일본과의 관계로 인해 야기되었다.
‘북송’ 사업에 대한 미국의 침묵과 방조는 일본 재정 부담을 완화시키고, 이승만 정부에 대한 정치적 압력으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 부분은 앞으로 학계와 전문가들의 연구를 통해 보다 구체적인 내용들이 드러날 것이다.
이승만에 맞서 1960년 대선 경쟁자로 나섰던 민주당의 조병옥은 ‘북송’ 사건을 국난으로 규정하고, 이를 막지 못한 책임을 물어서 강경한 대정부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1959년 일본 니가타항에서 재일동포 975명을 태운 북송선(北送船)이 출발하고 있다. 1959~1984년 재일동포 9만3000여명이 북송선을 타고 갔다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마이니치신문>
역설적이지만 1959년 12월 14일 첫 북송선이 니가타에서 출항하기 전까지 한국 사회에서는 엄청난 북송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십 여 명의 북송저지 공작대가 바다를 건너 일본에 잠입하려다 배가 전복되어 사망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북송 재일한인들이 북으로 가기 전 머무를 예정이었던 니가타 일본적십자 센터를 폭파하기 위한 시도도 있었다.
말 그대로 전국적인 시위와 반일 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외교 문제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보였던 이승만 대통령이 북송 문제를 해결할 것이란 기대감도 커졌다.
하지만 결과는 이승만의 패배였다. 첫 번째 북송선이 니가타에서 떠날 때 무려 9백 여 명이 탑승할 정도로 북송은 북한의 김일성, 재일 조총련, 그리고 일본 정부의 승리였다.
<중앙민중대회를 마친 후, 일본적십자사로 향하는 민단 시위대(1959년 9월21일)>
북송 저지에 대한 실패는 국민적인 실망감으로 이어졌다. 곧바로 60년 3.15 선거 국면으로 정국이 요동치면서 거리엔 집회와 시위대로 넘쳐났다.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전국적으로 번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북송에 대한 반일 감정, 패배의식 등이 교차했다. 어쩌면 북송을 통해 4.19의 국민적 저항과 여건이 하나하나 무르익은 것은 아닐까.
북송 사건은 단순한 과거의 한 지점에 머물고 있지 않다. 아무리 일본과 미국의 역할론이 새롭게 규명된다고 해도, ‘지상낙원’으로 재일한인 10만 여 명을 기만하고, 북에서 지옥보다 못한 삶을 살게 만든 김일성과 조총련의 죄과가 가벼워질 수도 없다.
북송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그렇게 끊임없이 동북아시아의 균형을 흔들고 있다. 그 내막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은 그래서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참고로 김용옥은 자신의 책에서 ‘북송선에 전혀 강제성은 없었다’고 주장하며 북한 편을 드는 행보를 취했다.
참혹한 북송 재일한인들의 삶을 제대로 알기나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인권침해와 강압적인 고문과 수용소 감금 등이 이뤄진 것을 두고 ‘민족의 대이동’이라고 하는 그의 저의가 의심스럽기만 하다.
문재인은 재임 시절 이 책을 읽고 나서 ‘우리의 인식과 지혜를 넓혀줄 책’이라며 일독을 권했다. 우리 나라 대통령이 맞기는 한가?
9월 5일 오후 7시 트루스포럼에서 가와사키 에이코 여사와의 대담 시간을 통해서 ‘북송’의 본질에 대해서 발표를 할 계획입니다.
위드코리아USA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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